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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 작성자 사라 지다
  • 작성일 2020-12-10
  • 조회수 703

태초의 인간은 농담弄談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농담을 영영 없게 것이다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과 같은 말이자 다른 말이고 안다는 것은 안다고 믿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감은 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럴 때마다 잔향殘香은 어찌할 없이 잔양殘陽이라고 들려서 눈을 감아도 빛의 온도는 아득해서

 

짓궂은 일기예보처럼 느닷없이 비가 내리는 장면에서 도로 가운데 있다 내가

이제 이런 꿈은 꿈이라고 알아챌 나이가 되었다고 누군가 꿈에서 말하는데

 

나는 나이를 먹을 수록 작아지는 사람

오래된 오선지에 적힌 플랫처럼 비어버린

 

가느다란 팔에 십자가 달린 은팔찌가 채워진다 주여, 부디 아이를 용서해 주시옵고... 아름답고 순수할 수록 쉽게 잔인해지는 세상에서 아름다움과 순수는 잔인함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족쇄는 족쇄의 형태일 때만 족쇄인 것은 아니므로 팔이 땅으로 떨어진다 중력은 지구를 사랑한 인간이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떠오르면

 

불을 붙인 풍등처럼 가볍게 떠오르고 싶다는 생각

위로 올라갈 수록 어둑해지는 성질은 하늘만의 것이 아니다

사라 지다
사라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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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믹 롱 페이스

개머리판에 늘러 붙은 검붉은 피를 닮은 수치심을 들키고 싶지 않아 화장을 했지 조악한 분홍색 파운데이션 케이스를 열어 퍼프를 들고 얼굴을 내리 눌러 만든 인조 피부를 나는 사랑했던 것도 같은데   잘린 손가락이 만져지는 환상통을 겪으며 화장을 배운 적 없는 서툰 손길에 화가 나 온종일 피부를 긁어 버렸지 나는 갈린 손톱 따위가 궁금하지 않았으므로 늘 컨실러를 두껍게 바르고는 했지만   문득 고개를 돌리면 얼굴 없는 이가 기척 없이 앉아 있다 새파래진 입술을 떨며 알 수 없는 이국의 언어를 뱉으면 어느새 화장이 섞여 흐르는 땀, 얼굴에서 흘러내린 백탁액을 문질러 닦을 때면 내가 조금이나마 사람을 위하는 선량한 사람이 된 것 같았지   총구를 입 안에 넣고 엄지로 방아쇠를 당겨 봐요, 홍콩의 살인청부업자가 가르쳐 준 자살법이 구룡성채 안에서만 성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도심의 한 빌딩 벽에 빨간 립스틱으로 그래피티로 남겨 두는 미래를 본 가브리엘은 자신을 용서했을까   밤이면 건조기에서 말라버린 인형이 된 것 같은 느낌, 스케치북처럼 찢기는 영혼과 참을 수 없는 토슈즈의 감각, 나의 근육이 기어코 자멸하는 것일까   덩그러니 놓인 나체의 살을 태우고 뼈를 갈아 불에 탄 숲에 던져 놓을 이의 이름을 궁금해 하고 싶었다 이런 건 마치 꿈에서 자전거를 타다 팔이 부러졌던 이의 생각인 것만 같고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웅크린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여린 이름들을 나지막히 불러 본다 그들이 나를 부른 것처럼, 그들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처럼   그러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눈 내린 일요일 아침, 앙상한 나무에 걸린 햇빛을 오래 바라 보았다 눈이 부셨다

  • 사라 지다
  • 2021-02-04
열아홉

볕은 어두운 곳에는 결코 들지 않아서 곁과 한 음절이 다른 걸까 숨을 멈추고 바라본 곁에는 볕이 서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닌 곁의 볕   때로는 모르는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 이름 모르는 종점에 도착하고 싶었다 이름 모르는 열병은 유행처럼 번졌고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우는데   너도 울 때 소리를 내지 말아 봐, 그럼 특별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머리칼을 당겨 엉킨 머리를 뜯어내고 싶어졌다   가로등이 몰래 죽는 새벽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었다   초콜릿을 이로 깨 먹는 동안 수북히 쌓인 편지들, 베란다 난간에 걸린 이불처럼 가벼워지는 새벽, 일가족이 한 줄로 서서 나란히 걷는 해변   손 끝에 닿는 정오의 시린 눈발   어둠에게도 자신의 탄생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알고 싶지는 않았다   가끔은 이 모든 게 거짓말 같다 용서할 수 없는 것들만 쌓여 간다

  • 사라 지다
  • 2020-12-05
성탄제

사샤Саша*, 교회에 나가면 교외에서 네 피를 빨아 먹고 사는 나도 신이 용서해 주는 줄 알았어   신은 나를 사랑하실까 물어 보면 너는 꼭 신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두 번 말하지 너의 투명함이 부러질 듯이 휘어지는 게 좋아서 나는 두 번 묻고 너는 네 번 말하지     헬로우 사샤, 굿바이 사샤   고속도로를 달리는 네 구급차에 누워 케타민 주사 찔러 넣으면 어느새 도착해 있는 옥상 난간에 배를 걸고 싶어져   귀적鬼籍** 같은 나의 궤적이 발치에 쏟아지고   뜯기지 않는 약 봉투를 들고 울어 버리면 번개탄을 담은 검은 봉투를 손에 꼭 쥐면 나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걸까, 사샤     헬로우 사샤, 굿바이 사샤   ㅁ 받침은 여운이 오래 남게 되어 있어 입술을 일부러 오므려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 알아 둬 마음이라는 것에는 붕대를 감아 줘야 돼 유통기한이 짧은 파란 심장은 자주 살펴 줘 안아 주겠다고 약속해, 사샤     (헬로우 사샤, 굿바이 사샤)   나는 마치 눈 오는 어느 겨울 밤 빨개진 손으로 정성스레 다듬은 눈사람 같지 아침이 되면 전부 녹아 존재했었다는 축축한 흔적만 가득한     (헬, 로우, 사, 샤•••, 굿바•••이, 사•••샤•••)   사샤와 나는 불이 차갑게 타오르는 풍경을 본다   춥다     * 사샤Саша : 인류의 수호자, 슬라브식 이름의 애칭. ** 귀적鬼籍 :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평온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승려의 죽음을 이르는 말.

  • 사라 지다
  • 202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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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국

    안녕하세요, 사라 지다님. 또 뵙습니다. 시 잘 읽었어요. 환유적 연쇄라고 할까요, 시의 흐름이 흥미롭게 읽히네요. 다만 아쉬운 것은 화자의 설명적 진술이 저에게는 일종의 강제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과 같은 말이자 다른 말이고 안다는 것은 안다고 믿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표현이나 “아름답고 순수할수록 쉽게 잔인해지는 세상에서 아름다움과 순수는 잔인함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족쇄는 족쇄의 형태일 때만 족쇄인 것은 아니므로” 라는 표현들이 의미를 지니고는 있지만 진술 과잉처럼 느껴지거든요. 화자가 독자에게 독해의 방향을 강제하는 느낌이었어요. 연과 연 사이에 놓인 여백을 통해 생각의 여지를 달리 하도록 이끄는 것 같으면서도 ‘내 생각은 이래’라고 딱 결정해 놓고 그 길을 따라 오도록 강요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관념어를 나열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전복시키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건 아닐까 생각하게도 하네요. 조금 더 문장을 불친절하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 2020-12-13 22:44:09
    이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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