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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06-15
  • 조회수 874


 

 언니 자는 거야 아니 안 자겠지 잠들지 않았을 거야 언니는 언제나 자는 척을 하니까 


 빛은 비스듬하게 밤을 통과한다 창문 너머로 비바람이 쏟아진다 옥상의 풍향계는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서랍도 딱 그만큼 어지러울 것이다 우리 앞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빛줄기를 삼킨다 혓바닥을 긁으며 언니를 찾는다 


 언니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모를 수 없겠지 좋아할 거야 언니는 언제나 나보다 높은 계단에 앉아 고개를 위로, 위로 돌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시인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했는데 언니는 미래가 좋다고 했잖아 서랍 속에서 스카프를 꺼내며 마구 자른다 


 엄마는 우리 보고 초록색 피를 가진 애들이라고 했는데 나는 막 웃었어 초록이 너무 좋아서 미래처럼 펼쳐지는 엄마의 실크 스카프가 무늬가 예뻐서 

 그런데 언니는 웃지 말라고 했잖아 언니는 어떻게 웃지도 않고 미래를 사랑할 수 있었어?

 엄마의 말마따나 우리는 피만이 아니라 피부까지 초록빛인 여자들이었는데도

 덜 익은 애벌레 같은 몸을 긁으며 추락해도 미래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었어?


 닭 모양 풍향계가 계속해서 돌아간다 어디가 북쪽인지 알 수 없다 바람이 불면 안개가 가셔야 하는데 왜 이 땅에는 둘 다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 어느 한쪽이 어서 떠나길 바란다 언니는 여전히 자는 척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풍향계가 날아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언니가 키우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스팔트, 천천히 끓어오른다 누군가의 헤드라이트가 집을 잠시 비추고 가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행복한 건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잖아 언니는 다행이라는 말을 자주 썼잖아 그거 알아 언니 다행의 행이 행복의 행이래 웃기지 행이 많으면 다행인데 행에다 복까지 많으면 행복이라고 해 우리는 바닥에서 수많은 행을 써 왔잖아 문장과 문장과 문장, 밤마다 아래까지 내려가 주워온 단어들로 이어지는 행 그사이에 복은 없었나 봐 언니는 잠수의 달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여태껏 무얼 주어온 걸까


 언니 듣고 있는 거야 아니 그렇지 않겠지 언니는 언제나 자는 척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언니라는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무너지는 것 같고 갈비뼈가 가렵고 이 모든 게 실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언니의 언니의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 생각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빳빳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구겨진 적이 있어야 펴질 수도 있는 거잖아


 언니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 이 작은 혹성에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조도가 부족해도 북쪽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 언니 북쪽으로 가야 해, 미래로 내일로 가야 해 그러나

 우리 집 풍향계는 하필이면 녹이 슨 닭 대가리


 손목을 뜯어보면 정말로 초록 피가 흐르고 있을까

 아무리 서랍을 뒤져 보아도 구겨진 천 조각만 나오고

 

 선이 많은 언니의 손목에 스카프를 둘러줄 테니 이제 그만 자는 척 해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비는 멎지 않았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캄캄한 언니의 눈꺼풀을 보면서

 북쪽으로 가야 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경이로움>

**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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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로지르는 것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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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10-04
둘러앉을 때 비로소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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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4-09-30
반려믿음

마지막 시 쓰기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미래의 쓰기라는 과제를 내주었고 제출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믿는 것으로 시를 쓰기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쓰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를 받아들고서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며 나는 내가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무수한 블록을 쏟아놓고 천천히 조립하는 아이처럼 두리번거리며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아주 어둠 뿐이었지만 저편에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이마를 조용히 쓸고 지나갈 때 일찍이 땅바닥 보는 법을 알아버린 스킨답서스 그 곁에서 식물을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던 룸메이트의 옆모습이 흰빛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떻게든 식물을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 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너는 화분 하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마치 쏟아야 하는 몫이 있다는 듯 매일 창가로 가서 바라보았으니까 반려식물이 시들 때마다 화훼 시장에 다녀오던 너에게 가끔 묻고 싶었다 아직이냐고 그러니까 사랑하고 싶을 뿐이냐고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기를 소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침이 오면 내 시끄러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서 화분을 돌보던 모습 눈을 뜨면 언제나 창문 옆에 꼿꼿하게 서 있던 너를 속눈썹에 붙은 잠기운을 털어내지도 못한 채 쳐다보았다 오래도록 남았던 잔상 하얀 빛처럼 넘실거리는 옆모습을 위해 썼던 시들 가방 속에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선생님이 누구를 집요하게 기억하는 중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어째서 대답하지 못했는지 사랑한다는 말의 범주는 손목에서 헐렁하게 흘러내리는 머리끈 같고 빛속에서 다시 오래된 끈으로 머리를 묶은 채 걸어나가는 밤 정류장은 아직 먼 곳에 있었지만 아직은 낱장으로 날아다니는 시들로 묵직한 가방 그 무게를 믿으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제출하기 어려운 말들만큼 깊숙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며 우선 계속해서 걸어보기로 했다

  • 모모코
  • 2024-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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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인

    안녕하세요, 최지인입니다. 모모코님의 시 ‘항해’ 잘 읽었습니다. 저번 시 ‘서머’보다 훨씬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모코님의 삶이 시와 언어에 녹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경쾌한 문체도 좋습니다. 상상력도 좋고, 집중력도 좋습니다. 집요하게 언어를 밀고 나가는 힘도 좋습니다. 앞으로도 이 감각을 잊지 말고 정진하길 바랍니다.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3-07-05 15:12:12
    최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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