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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여름의 날들

  • 작성자 유로치카
  • 작성일 2023-09-12
  • 조회수 488

 동토가 아직 녹지 않는 영원의 땅에도 잠시의 온기는 찾아온다고 했던가 금지된 열기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으나 익숙해지는 게 느껴질 때 나는 부조리함을 느꼈다


 광장에는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거리를 걸으며 녹아내리는 눈을 손에 담아 초록빛이 다가오는 하늘에 대보는 것 그것이 여름


 우리는 항상 펜을 잡고 현미경을 만지작거리다 종이 울리면 밖으로 나와 정원 벤치에 앉아 저항할 수 없는 무력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6월 15일이 생일이라는 나에게 그렇다면 6월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축하해 주겠다고 다짐했던 너 나지막이 말한다 이것으로 나는 너에게 기억되었으니 너는 나를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 


 결정이 내려앉아 아직 녹지 않은 눈꺼풀 조용히 들어 웃는다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라고 그러니 확신 없는 말은 곱게 접어두었다가 다음 해에 꺼내달라고 답한다


 *가려진 커튼이 아니더라도 마음껏 마실 수 있으며 또한 피부와 피부를 꿰매어 잠시동안 하나가 되는 자유 티켓 한 장과 맞바꾼 사랑의 증표들


 이 계절은 곧 끝날 것이며 다시 빙하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전까지 볼을 맞대고 있는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탑은 이끼가 끼어 그 자리에서 나무가 되었다 흙이 되어 생명의 순환으로 돌아간다


 어느새 우리는 열광의 세계 속 녹아들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은 잔열을 다시 불태울 때쯤 몇 달 전 죽은 나의 사랑이 생각났다 그다음 해 6월 30일에는 태우고 남은 재를 유골함에 넣었다


*예브게니 쟈마틴의 소설 <우리들>의 설정에서 영감을 얻음.

유로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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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원고, 불타는 나의 조국, 석류나무 그리고 아라사의 밤

1965년 X월 XXX일에는 저명한 작가 T-2 씨가 죽었다 그다음 날에는 그보다 조금 더 유명한 T-116 씨가 죽었다 장례식에는 300명이 참석했다 F-167 씨는 여관에서 담요를 빌리려 했으나 돈이 없었다 아침에 깡마른 중년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P-1719 씨가 사는 아파트 주인은 그가 곧 죽을 거 같다고 이야기한다 월세를 올리자마자 그는 계단을 기어 올라가면서 울었다고 이야기했다 불타는 원고, 불타는 나의 조국! 또한 어느 곳에서는 이끼 낀 테라리움 속에서도 피어나는 필멸자들의 사랑이 있다 그것이 네가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약속한 것 하지만 이제 네가 말하는 모든 말들은 날붙이가 되어 돌아왔지 네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총알이 된다는 기묘한 밤 이것이 아라사의 밤 누구도 원하지 않는 끝없는 어둠의 밤 그런 네게 두 달 전 보냈던 편지는 당연하게도 잊고 있었다 답장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나 스스로 과육을 씹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M,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일은 이제 지쳤다고 네가 중얼거리는 걸 들었어 그때 나는 나는 말 없는 동의의 끄덕임을 너는 눈웃음을 지으며 다음 여름에 함께 죽자고 이야기했었지 하지만 말이야 사실 내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어 알잖아 내게 그런 말은 너무 무거우니까 말이야 그렇게 달린 무게추만 내 사랑의 개수만큼 달렸더라 애석하게도 M, 이리 생겨난 마음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 바닥을 구르면서 절망과 환희가 섞인 표정으로 너를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면 너의 행복을 생각하며 꽃다발을 네 입에 물려주어야 할까 M, 나는 그저 네가 가진 심해에 침전하고 싶을 뿐이란다 나를 바라봐주련짝이 맞지 않는 구두임을 알고서도 나는 여전히 그 구두를 신고 나간다 어쩌면 마주칠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또한 너를 위해 또 마지막은 나를 위해 그렇게 우연히 만날 우리는 하나의 그물로 연결되어서 저 멀리 낙원에 묻힌 채 들려오는 서로의 메아리를 흙 밑에서 음미할 것이다 그 옆 들판 검은 귀들이 듣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더 이상 너와 네게 중요한 파편이 아니었다

  • 유로치카
  • 2024-06-14
네가 가장 사랑하는 꽃과 낚싯대를 들고 나는

창가에 둔 식물의 이파리가 흐물거린다 마치 미련이라도 남은 듯 꿈틀거린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어째서? 그러니까 그쪽은 멍청하고 착해서 죽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어째서요. 가족들한테는 어떻게 말하죠? 가족이 있습니까? 아니요 내 가족은 하나죠 내 말은 말 귀 못 알아듣는 내 개들에게는 어떻게 말하냐 이거예요 명확하지 않은 인물들의 지칭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은 바로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고요한 설원의 일 누군가는 창조할 수 있는 심장을 누군가는 지구 끝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을 그리며 떨어지는 얼음 유성을 바라보았지 네 심장을 뜯고 파해쳐 손에 쥔다음 차가운 입술을 뜯은 다음 이마를 맞대고 한참을 가만히 있어 잘 들어 나 이제부터 암에 걸릴 거야 뼈암에 걸려서 고통스럽게 죽을테니까 네가 먼저 죽어서 나를 잊어버려 눈물방울 뚝 뚝 뚝. 찰칵. 위대한 역사의 한 장면, 전쟁으로 인한 이별을 앞두고 마주 보는 연인. 문득 지난달 나눈 이야기가 떠올라서 괴로워졌다 네가 남겨준 옷을 등 위에 덮고선 양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인다 참지 못하고 달려간다 노동자들도 쁘띠 부르주아도 존재하지 않는 폭설의 타이가 숲으로 제 옷보다 몇 치수나 큰 군복 코트 입은 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주저앉아서는 남겨진 핏자국을 초점 없이 바라본다 해는 이미 졌으며 다시 한번 겨울의 폭풍이 몰려오고 있으므로*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체벤구르에서 영감을 받았음.

  • 유로치카
  • 2023-12-28
무화과 나무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낙후된 추락의 에덴동산 나무가 만들어낸 빈민촌 여름이면 산벌레가 기어들어오는 곳 밤이면 남들은 못 보는 달을 보는 곳 정겹지 않다 그저 역겨워 치가 떨려서 손을 꽉 쥘 뿐 나의 영혼은 21m쯤 떨어진 곳에 육체와 떨어져 묻혔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그곳에서 나를 찾지 마라고 외쳤지 언니 언니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무르익다 못해 짓무른 열매를 끌어안고 터진 거예요 나는 아직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고 언니 그림자는 내 발 밑에 눌어붙었는데 이젠 손끝에 캅사이신이 파고들어도 씻어줄 사람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언니는 모르지 아마도 영원히 모르겠지 몸과 마음을 거짓된 도자기 유약으로 꾸미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아마 내가 겪을 수 없는 감정 느꼈다면 당신은 여기 있었을 테니까 당신들은 모르잖아요 눅눅한 장판에서 1년 내내 살아가는 것 수도와 가스가 끊겨 살아갈 수 없어 집을 나왔다 들어가는 것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으니 답답해서 몇 날 며칠을 울었다며 일기장에 굵은 글씨로 써놓았다고 했죠 언니 그거 알아요 이제 나는 큰소리에 놀라지도 않고 셔터 소리에 몸을 움찔거리지도 않아요 내가 태어난 노란 모래사장을 발로 걷어차지도 않고 지나간 날들을 보며 웃을 수 있는 모습을 언니도 보면 좋았을 텐데 참 좋았을 텐데 작년 겨울 포차집에서 곱창전골 시켜서 먹으며 하던 소리 너는 다시 태어나면 부족함 없는 곳에서 태어나라 곱게 접은 두 눈 눈물 고인걸 마지막으로 강물이 되어 흘러간 내 사랑 품어주었던 나의 빛을 두고는 은하수 가꾸러 저 멀리 날아간 사람을 붙잡긴 힘들겠지요 그래도 가끔씩은 물어봐주세요 거긴 지옥이냐고 바람 부는 옥탑방 서울의 빛이 가득한 이곳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인조 파도소리가 가끔 들리는 곳 별이 밝아요 이번 연도에는 꼭 오세요 못 다 전한 꽃다발 들고 기다릴 테니바람 부는 옥탑방 서울의 빛이 가득한 이곳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끔 들리는 곳

  • 유로치카
  • 202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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