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노커」를 배달하며
- 작성일 2023-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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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재앙에 대해 말한다. 뒤에서 치고 가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는 사람은 말을 잃게 된다.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재앙이다. 이것이 블랙코미디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역병의 시간을 지나며 경험했다. ‘거리 두기’, ‘격리’라는 단어에 들어 있던 부정적인 어감이 빠르게 희석되었다. 사람의 얼굴은 바라보면 안 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엄마’는 보면 안 되는 딸의 ‘얼굴을 두 눈 뜨고 똑바로 바라볼 거’라고 말한다. ‘너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든 간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엄마는 일부러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 딸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든 간에’ 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 그녀는 예감도 상상도 하지 않고 있다. 엄마가 각오해야 하는 것은 딸이 어떻게 변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이다. 그런데 그 각오를 하지 않는다.
사랑이 무엇인지 문득 깨닫는다. 사랑은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예감, 상상,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일어났고 일어날 일을 예감, 상상,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변했든, 변하든, 그 변화와 상관없이, 거기 있는 게 ‘그냥 너 자체’라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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