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구자명,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을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8-03
  • 조회수 1,057


   나는 진눈깨비가 좋다. 눈도 비도 아닌 그것. 눈이 될 수도 비가 될 수도 있는 그것. 그때그때 대기의 상태를 봐서 자기 정체성을 결정하는 그것. 그 선택이 있을 때까지 한껏 머뭇거리며 기다리는 그것. 그래서 그 기다림 안에서 자기 시간을 숙성시켜 가는 그것.


(구자명,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건달바 지대평』, 나무와 숲, 2023, 259쪽)


소설가 이승우
구자명,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을 배달하며
   자기 정체성이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없어서 생기는 문제보다 과해서 생기는 폐해가 더 큰 것 같다. 입장이 너무 견고해서, 과해서, 다른 입장을 용납하지 않아서 세상이 시끄럽고 무서워진 것 같다. 머뭇거리고 눈치 보고 기다리지 않아서, 자기 주장만 할 뿐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문제인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무소신, 자존감 결여, 우유부단함으로 치부하고 꺼리는 것 같다. 정체성이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 속에서, 타인들과의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성찰과 배려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자기만 아니라 타인을 자신의 판단과 선택의 요건에 포함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때그때 대기의 상태를 봐서 눈이 되거나 비가 되는 진눈깨비처럼, 머뭇거리고, 상대를 의식하고, 기다리고, 이래도 되는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헤아리는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나의 헤아림에 의해 다른 사람이 고양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헤아림에 의해 내가 고양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기다림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숙성시키는 과정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추천 콘텐츠

손경숙 배우의 목소리로 듣는 김숨 소설가의 「벌」

봄을 세 번 나는 동안 벌통들에서 차례로 벌들이 부활했다. 벌들로 들끓는 벌통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죽은 아버지가 되살아난 것만 같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아카시아꽃이 지고 온갖 여름 꽃들이 피어날 때,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마씨는 벌들이 날아가지 못하게 벌통을 흰 모기장으로 감싸고 지게에 져 날랐다. 마씨의 뒤를 따르는 내 손에는 해숙이 싸준 김밥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그날따라 너무 깊이 드는 것 같아 주저하는 내게 그가 재촉했다. “꽃밭을 찾아가는 거야. 조금 더 가면 꽃밭이 있지.” 정말로 조금 더 가자 꽃이 지천이었다. 토끼풀, 개망초꽃, 어성초꽃, 싸리나무꽃··· 홍자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싸리 나무 아래에 그는 벌통을 부렸다. 벌통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마씨와 내가 알몸으로 나뒹구는 동안 벌들은 꿀을 따 날랐다. 고슴도치 같은 그의 머리 위로 벌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나는 꿈을 꾸듯 바라보았다. “당신 아내가 그러데, 나비를 기르면 좋을 거라고. 나는 나비가 벌보다 무서워. 우리 할머니가 나비 때문에 눈이 멀었거든. 도라지밭을 날아다니던 흰나비의 날개에서 떨어진 인분이 눈에 들어가서···” “해숙은 착한 여자야.” “착한 여자는 세상에 저 벌들만큼 널렸어!” “널렸지만 착한 여자와 사는 남자는 드물지.” 여름내 마씨와 내가 벌통을 들고 산속을 헤매는 동안 해숙은 아들과 집을 보았다. 우리가 돌아오면 그녀는 서둘러 저녁 밥상을 차려내왔다. 먹성이 좋은 마씨를 위해 그녀는 돼지고기와 김치를 잔뜩 넣고 찌개를 끓였다. 그녀에게 나는 산속에 꽃밭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이. “우리도 데려가면 안 돼?” 그녀는 꽃밭을 보고 싶어 했다. “꽃밭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안 돼. 가는 길에 무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무덤들 중에는 내 아버지 무덤도 있지.” “근데 읍내 정육점 여자가 내게 묻더라.” “뭘?” “사내 하나에 계집 둘이 어떻게 붙어사느냐고.” “미친년!” “정말 미친년이야. 내가 살코기하고 비계하고 반반씩 섞어 달라고 했는데, 순 비계로만 줬 지 뭐야.” 눈치챘던 걸까. 아니면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날도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해숙이 우리를 몰래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해숙은 산벚나무 뒤에 숨어 마씨와 내가 토끼풀밭 위에서 알몸으로 나뒹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날이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은 마당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부엌 도마 위에는 해숙이 정육점에서 끊어온 돼지고기가

  • 관리자
  • 2024-06-27
최윤, 『사막아, 사슴아』를 배달하며

  • 관리자
  • 2023-12-21
방현석, 『범도』를 배달하며

  • 관리자
  • 2023-12-0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