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일, 『바오밥나무와 달팽이』를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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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피우기 위해 45억 년을 기다리고 있는 씨앗은 말한다. 원한다고 해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고. 꽃이 피는 걸 보려면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원하는 이가 보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이가 본다고 한다. 꽃은 모든 씨앗들의 꿈, 그러나 꿈꾸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꿈이 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어느 순간 갑자기 꽃이 피어난다고 한다. 어느 순간 갑자기 태어나니까,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 없는 누구나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지금 여기 있는 누구나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있기를 바라는 누구나 무엇을 기다린다. 지금 여기 있기를 바라지 않는 누구나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그, 혹은 그것이 여기 없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혹은 그것이 여기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기다린다. 바라는 마음 없이 기다릴 수 없다. 바라지 않는 사람이 기다릴 수 없는 것처럼 바라는 사람이 기다리지 않을 수도 없다.
기다림은 45억 년을 순간으로 만든다. 어떤 천 년은 하루 같고 어떤 하루는 천 년 같다. 아니, 기다림은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은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난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 라고 씨앗은 말한다. 아름다움이 문득 태어나는 어느 순간이 그 ‘때’다. 때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결정적이고 특별한 사건(카이로스)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45억 년을 기다리는 것이 가능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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