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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시·시조 고선경 - 「여름 오후의 슬러시」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여름 오후의 슬러시 고선경 투명한 봉지 속에서 금붕어가 헤엄친다 너와 보도블록을 따라 걸을 때 슬리퍼가 너무 작다 슬러시에 꽂힌 빨대 하나로 너와 감기를 나눠 마시는 생각 왜 이렇게 기우뚱하게 걸어 금붕어도 멀미를 느낄까 나는 계단도 침착하게 굴러 달고 끈적이는 슬러시를 엎지르면서 가끔 얼음 알갱이가 씹힌다 아 시원해 교실 문을 열자마자 마루에 눕고 싶고 우리의 체육복은 지저분하다 땀과 흙이 점점 번지면서 체육대회를 지속하려 한다 열기를 견디는 것까지가 경기이듯이 여기를 견디는 것까지가 규칙이다 슬러시에서는 열대 과일 맛이 났다 맛이라기보다는 향에 가까운 우리는 기후를 베끼려 했다 몸에 판박이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였고 잘 안 지워졌다 슬리퍼 한 짝이 음수대 위를 출렁거렸다 봉지만 벗어나면 익사하는 금붕어 금붕어는 죽다 말다 하면서 슬리퍼를 통과했다 증상인지 사랑인지 구분되지 않는 나의 멀미 오후와 주황빛은 잘 어울리고 아주 잘 어울리면 거의 투명해 보인다 너는 연장전에 지친 선수처럼 퇴장한다 종이컵을 우그러뜨리고 나이스 슛 쓰레기통이 기우뚱하더니 내용물을 쏟는다 퉁퉁 불은 한쪽 슬리퍼와 녹다 만 슬러시 체육대회가 끝난 다음 날의 기분 계단에서는 언제나 짜디짠 냄새가 났다 결정적인 감염 영화가 끝난 뒤 티브이를 끄고 욕조에 눕는다 욕조는 희고 차가운데 어쩜 비가 내리네 갈비뼈 안쪽에서 따뜻한 비가 내린다 따뜻한 비에 젖다 보면 회상에 잠기기 좋은 상태가 된다 상태는 현상에 가깝다 결정적인 장면 없이 현상은 나타난다 이를테면 지난 여행 같은 것 그 여행에서 나는 형제를 잃고 좀비를 얻었다 좀비는 나를 사랑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뒤 티브이를 끄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함께 비를 맞았으므로 좀비와 목욕탕에 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핸드폰을 켜서 사진 찍었다 나는 사진 찍는 사람을 곁눈질했다 저 인간이…… 세계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목격하면 안 되는데 그러다 세계사에 기록되면 어쩌려고…… 좀비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나와 사진 속에서 나란히 늙어 갈 것이 좋다고 하였다 나는 사진은 늙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사진은 낡아 가는 것이야 아니 그마저 불가능할 것이야 왜냐하면 세계는 이미 데이터화되었다 오 그것은 축하할 일 일일이 회상에 잠기지 않아도 좋을 일 사진을 찍은 사람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축하는 우리의 몫이야! 냉정하게 말했다 목욕을 하는 동안 노래 흥얼거리면 누군가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누구냐 하고 고개를 들자 영화배우가 보였다 영화배우는 좀비 분장을 하고 있었다 좀비와 좀비 분장을 한 영화배우가 구분되지 않았다 영화배우가 사랑을 연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배우의 연기가 훌륭했으므로 그 장면은 결정적인 장면이 되어 가고 있었다 미래에도 회자되면 어쩌려고…… 그런 걱정이 끝나기도 전에 좀비는 좀비 분장을 한 영화배우의 목덜미를 물었다 목덜미를 물린
작성일 2022-10-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553상세보기 -
시·시조 백지은 - 「시간의 쪽방촌」외 6편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2321상세보기 -
시·시조 박종익 - 「뜬구름 집」외 6편
뜬구름 집 박종익 차오르는 물살 끌어와 구름집을 샀어요 딱히 집이라고 하기에는 겨우 물살의 끝점 물거품으로 기둥 세우고 지붕을 올려 봅니다 지푸라기 한 줌 얼씬거리지 않는 자리에 파도가 쓸려간 구름집 한 채 모래집이 허물어지고 몽돌이 으스러질 때까지 물거품이 목숨값을 흥정합니다 저 오갈 데 없는 수많은 찔룩게들 물 주름은 어쩌라고요 가진 게 파도뿐인 바다는, 그저 아가미가 떡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보증금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다는데 엘니뇨가 드리우고 간 구름 지붕 아래서 월말이면 민들레꽃이 피었다가 다시 시들고 맙니다 질경이꽃도 꽃이라고, 꽃게가 가위 손을 흔들며 바닥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이제 막 품에서 보풀같이 풀려나온 주꾸미들 어느 바다 어느 하늘에서 꿈꿀 수 있을까요 파도는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떠도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구름도 별자리도 얼씬거리지 않고 물거품만 보송보송 피어오르는 구름집을 남의 속 모르는 소라게가 자꾸만 기웃거립니다 허리끈 위아래로 길게 하얀 줄이 도드라진 추리닝을 입고 학교에 가요 외줄 허리끈을 힘껏 잡아당기면 아버지의 낡은 소가죽 허리띠보다 몇 걸음 더 팽팽해져요 허리가 헐렁하면 지각할지 모릅니다 친구들과 달리기해요 검은 고무줄로 허리를 꿴 친구들이 앞서가요 힘차게 달려나갈수록 허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흘러내려요 앞발과 뒷발 사이에서 몸통은 엇박자로 뒤뚱거리고 언제 넘어질지 모를 불안감이 등을 떠밀어요 무릎에 구멍 나는 것보다 허리가 헐렁한 것이 더 무섭고 살 떨려와요 언제 쓰러질지 모를 일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매일 달리기 전에 허리를 바짝 졸라매요 허리를 당겨 매는 만큼 달리는 발소리는 더 경쾌하거든요 바지와 나는 점점 한몸이 되어가요 집에 돌아갈 때는 달그락거리는 빈 도시락의 울음을 업고 나는 다시 달려야 해요 구멍은 어머니께서 작은 바늘로 메워 주실 거예요 장에 가신 아버지는 노란 생고무 줄을 사 오실지 몰라요 내일은 일등으로 달리고 싶어요 술을 드시는 건지, 저녁별이 멀어질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네요 허리끈이 팽팽하게 당기는 저녁이었어요 빵에 대한 상대성이론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비껴간 빵은 더는 식욕의 포로가 아니라 탐욕이다 참치김밥 한 뼘이 삼천 원일 때 삼천 원의 분량을 크기로 풀어보면 식빵의 깊이와 폭이 가장 넓다 하루 남은 유통기한에 목숨이 저당 잡혀 있는 옥수수빵 봉지를 뜯으며 싱그러운 딸기밭을 걸어간다 먹어도 먹어도 식욕은 당기는데 나는 배고픈 돼지가 아니어야 한다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순간 빵을 떠난, 부스러기가 비바체 속도로 비둘기 발등에 날아든다 식욕 앞에서 비둘기가 나와 빵부스러기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빵이 걸어온 이력과 함수관계를 의심한다 거대한 시조새 부리에 묻은 하얀 빵가루에 탐을 내는 야만의
작성일 2023-08-1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93상세보기 -
시·시조 김태희 - 「사막의 유랑(流浪)」외 6편
사막의 유랑(流浪) 김태희 바람의 꼭대기는 지루한 비명이다 끝없이 자라나는 사막의 나이테도 인간의 목소리 아닌 오로라의 누명(縷命)이다 모래에 묻혀있던 밤하늘의 별을 보고 은밀한 허기짐이 달려오는 신기루도 멍울진 환부 속을 나는 휘파람의 눈빛이다 어둠의 근친들로 숨어들던 지문들이 누웠던 흔적 위로 예감처럼 가려웁다 그리운 감염으로 덮인 캐러밴도 유랑이다 아! 병목안 삼거리에서 영하의 소매 끝에 설렘을 꼭 쥐고 선 병목안 삼거리는 그리움을 앞에 둔 채 어디서 첫사랑 한 소절 눈발처럼 나부껴 머리엔 눈을 이고 도톰한 옷 펄럭이는 아~ 아! 저 멋쩍은 웃음까지 기억하며 무동 탄 눈송이처럼 걸어오는 발자국 떨리는 헛기침에 발만 동동 구르는데 창박골 어디선가 분홍빛의 함박눈이 별안간 뜨겁던 가슴 속 동백처럼 벌어져 초원의 문장 새끼가 어미의 몸 그 밖으로 나온 순간 표범에게 목덜미 물어 뜯겨 축 늘어진 평원에 초식동물들 탄생이자 죽음이다 한 줄의 문장처럼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이 간결한 초원 위에 그려지는 생명의 녘 정박한 동물의 세계 삶의 트림 쿵쿵거려 한 발짝 뛸 적마다 그 등을 밟고 가는 세렝게티 누와 얼룩 심장 소리 펌프질에 먹잇감 혼비백산한 눈빛들이 잘려간다 토렴 국밥 오래된 주인장의 국자 질이 어설프다 한 번을 퍼 담고서 인심 좋게 또 퍼담아 몇 번을 담았다 쏟기를 반복하고 또 한다 모르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의아하고 퍼주기 아까워서 그러는 듯 보이지만 익숙한 풍경으로는 그 모습이 정겹다 추운 날 국을 풀 땐 할머니가 그랬듯이 이 동작 익숙한 걸 나중에야 알게 되고 음식을 먹기에 적당한 온도에다 맞춘 비법 세월 속 저만큼을 나앉은 오늘에도 그런 날 기억으로 남아있는 토렴 국밥 뚝배기 밥알과 국물에 식지 않을 뽀얀 기억 능금 꽃 희망 산비알 그 아래서 꽃향기로 그윽하던 외로운 가지 끝은 들새 떼 날아 앉아 하이얀 꽃잎 슬하에 피어나는 새순 소리 해 뜨면 북을 주고 해지면 꿈을 꾸는 해 고름 시작으로 애면글면 길어 올려 까맣게 그을려 피운 햇살 먹인 옹알이들 팔월의 뙤약 이고 동동 달군 단물 소리 하늘이 땅에 묻은 비바람과 엉긴 세월 초록서 익혀낸 날은 또 한 생을 길러 낸다 산골짝 주렁주렁 매달리는 저 포만감 그리움 포개오는 빨간 색의 동요 소리 옹골진 사과나무 꿈 쌓이도록 흥겨워라 매화, 저 바보 같은 꽃 얘기 이전에 열아홉 때 바람난 처녀같이 2월의 추위 속도 모르고 피워낸 꽃 어쩔까 철딱서니 없이 한껏 뽐낸 저 바보 꽃 그래도 새벽녘의 찬 공기 갈라놓고 조그만 꽃봉오리 터뜨린 용기 앞에 반가운 마음도 들고 애틋함도 나부끼고 한참을 혼잣말로 내 얘기 들려준다. 네 아래 울 엄마가 시집와서 봄을 맞고 예순 해 매실처럼 익다 또 하얗게 가셨지
작성일 2023-11-08 작성자 김태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26상세보기 -
시·시조 최지안 - 「물까치」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물까치 최지안 나무봉지는 과자다 흔들면 새가 쏟아졌다 상추밭에서 저녁을 쪼더니 쥐똥나무로 갔다가 단풍나무 속으로 퐁당 빠졌다 찰칵찰칵 핸드폰으로 찍자 찌르르 경보를 울린다 일제히 합세해서 울어 댔다 새들에게 나는 침입자 내 집에서 나가라 새들도 나무에게 방세를 주었을까 출입문을 여닫을 때마다 나무가 주섬주섬 새들을 삼켰다가 도로 뱉어 내었다 물까치는 꽁지깃이 연한 하늘색이다 몸보다 꽁지가 길어 작은 소리에도 파드득 놀라 옮겨 다니며 운다 약한 것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가 보다 열몇 번의 주소지를 바꾸며 살던 아비처럼 방 빼라는 말을 늘 머리 위에 얹어 놓고 말이지 아비를 흔들면 시큰한 술 냄새와 기약 없는 희망이 주머니 속 구겨진 천 원짜리처럼 떨어지곤 했다 밟으면 과자처럼 바삭하게 부서지지도 않았다 물까치 저녁으로 귀가 중이다 나무의 지퍼를 채우고 잎사귀에 하루를 파묻는다 좋겠다 돌아갈 집이 있어서 날개조차 없던 아비는 평생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했다 덫 바다로 걸어간 발자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얗게 떠오른 이름은 가장자리부터 젖어들고 허기진 발목은 모래밭에 시시한 생애를 꾹꾹 찍어놓았다 물살이 가벼운 중량을 지울 때마다 흔적은 흔적위에 겹치고 무너졌다 존재와 부재를 한 몸에 지니고 그렇게 잊히는 것이라고 바다를 따라간 날들은 짜디짰다 불면이 패인 고랑마다 소금기가 버석거렸다 야윈 삶을 비틀어 짜면 푸르고 짠 물이 똑똑 떨어졌다 흔들리는 날에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파도가 남루한 생을 야금야금 집어 먹으면 아니 삼켜버렸으면 소실점으로 남았을 때 뒤돌아봤을까 제방 가장자리를 따라 피어난 수초는 하늘하늘 몸을 흔들었다 내려가는 속도를 견디지 못한 발들은 수초에 미끄러지기 쉬웠다 갯바위를 베고 누운 하얀 뼈가 달밤이 이슥하도록 달그락거렸으리라 시린 풍경을 떠올리면 구멍이 뚫린 곳으로 물살이 스며들었다 허술하고 낮은 곳부터 파도가 흔적을 지우고 나면 모래밭은 새로운 덫을 놓았다 또 다른 발자국을 기다리면서 유성이 쏟아지면 - 부제 nightly calm1) 눈이 감기지 않아요 차를 마시면 괜찮을 거예요 카모마일이 도와줄 테니 스피어민트, 민트향이 들어간 초콜릿을 좋아하죠 입안을 헹구어 주는 느낌이 좋아요 설거지는 헹구는 것이 중요하죠 날마다 나를 헹구어도 일은 끝도 없이 나왔어요 점점 쌓여요 레몬그라스, 붕어빵엔 붕어가 없어요 레몬그라스에는 레몬이 없어요 결재서류엔 결재가 없고요 돌려받은 서류는 서랍으로 숨어요 사직서가 숨어 있는 곳에 보리수 꽃을 아는지요 발자국 같은 연노랑이 자잘해서 잘 보이지 않아요 잎들이 반짝이며 재잘거리는 소리에 신경이 끊길 듯 말 듯했지요 그 봄이 기울어질 때 애인의 발자국을 주워 양지바른 책갈피에 묻어 두었죠 산사열매는 붉어요 아침은 마개 없이 열리지만 저녁은 툭 터져 저물곤 하죠 한 번 터진 울음은 잘 닫히지 않아요 문제는 늘 가운데가 터져 버린다는 것이에요 가을이 깊도록 애인은 발자국을 가지러 오지 않았어요 잠을 가져다줄 것들을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97상세보기 -
시·시조 김뱅상 - 「박제 그림자」외 6편
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18상세보기 -
시·시조 차유오 - 「언덕의 모양」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언덕의 모양 차유오 끝을 기다린 적은 처음이었다 끝없는 모래 언덕을 오르며 생각했다 사람은 같은 일을 겪어도 다른 장면으로 각자의 기억을 갖게 된다는데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오늘을 기억하게 될까 언덕의 모양이 바람을 따라 바뀌는 동안 서로 같아질 수 없다면 철저히 달라지고 싶다고 너는 말해 주었지 같다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자 가까워지는 발자국들, 스쳐 가는 얼굴들 모든 기대가 허무하듯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지 언덕 위에 가만히 누워 어떤 사람은 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나 비슷해 보여서 올라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언덕은 언제나 내려가기 좋은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싫어하는 것들도 이상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언덕을 만들어 낸 것 같다 물 위에서 버티는 것처럼 강가에 앉아 말없이 강을 보는 사람들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은 얼굴이 되어 간다 우리는 오리의 뱃속으로 들어간다 페달을 밟으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간다 서로의 발을 보며 같은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발만 봐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이렇게라도 우리는 물 위를 걸어 볼 수 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 해 물 위에서 버티는 것처럼 사람보다 큰 오리는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 사람은 그렇게 오리를 잡아먹었는데 주변에는 잡아먹힌 사람들 움직이고 벗어나고 싶은 듯이 힘찬 발길질을 한다 저기를 봐 물살에 뒤집힌 오리는 가라앉고 사람은 떠오르는 것을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미 살아 있으면서 사람들은 자꾸만 돌아오는데 물 밖을 빠져나간 오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연체 누군가를 기다리는 책이 되어 책상 끝에 앉아 있는 아이 혼자라는 게 무서워서 도서관에 온다는 말은 아이보다 더 외로워 보였는데 책을 베고 자면 말랑한 머리는 딱딱해질까 그렇다면 깨워 줘야 할 텐데 다른 생각에 빠져 손을 베일 때 피는 종이 위에 서서히 번져 가고 커지는 건 언제나 슬픔뿐이다 피가 흐르는 순간에도 죽어 가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에 가까웠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피가 스스로 멈춰 버릴 때 몸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나는 매일 연체되는 것 같다 쥐의 죽음에 관한 고찰 죽은 쥐를 밟았다. 소리를 지르자 뒤돌아보는 사람들. 죽은 쥐는 보지 못한다. 떨어진 게 없으면 바닥을 볼 일 없으니까. 사람들은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로 걸어간다. 납작한 몸이 유일한 흔적이 되어 버린 쥐. 작은 몸으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 넓다고 쥐는 생각했을 것이다. 바닥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밟고 있는 모든 게 쥐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거나 상상할 수 있다. 온몸에 돋은 소름을 옷 안에 숨긴 채로 걸었다. 이 느낌에 무뎌지기 위해. 모든 죽음을 떠올려 봐. 어릴 때 키우던 동물이 가장 먼저 잊힌다는 사실을
작성일 2022-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852상세보기 -
시·시조 배영 - 「철든 물」외 7편
철든 물 배영 강물에 철이 들었다. 한때 후덥지근한 낙조(落照)로 술렁이거나 붕붕거리는 날파리들로 어수선했지만 가을 깊숙한 곳까지 흘러온 강물에 이제, 울긋불긋한 철이 들었다. 가을 물들은 다 일렁이는 일을, 반영(反映)에 든 나무들의 색깔에 맡긴다. 흔들리는 물 밖을 굳이 물속까지 끌고 들어간 늦가을의 투명, 철이 든다는 것은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물속이 붉은 물 밖을 흉내 내듯 읽어 간다. 그 풍경을 절정이라 한다면 저의 물색(物色)을 다 비운 강물의 수고가 깊다. 여름의 물속은 불어 난 깊이로 우거져 물속 일만으로도 무성했지만 가을 강은 물 밖 혼자 익어 가는 철을 들인다. 탁한 물색들은 다 돌 밑으로 숨어들고 쓰라린 살갗 같은 얕은 추위가 명경(明鏡) 위에 깃들면 물속에 잠긴 붉은 한철이 일렁인다. 제철을 받아들인 강물은 나뭇잎 술렁이는 일로 붉다. 사슴의 몸속에는 뿔 모양의 피가 흐른다 우물가 옛 아낙들의 험담엔 피를 탓하는 말들이 많았다. 사람의 성정(性情)은 그 사람의 피의 모양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쁜 피와 칭송의 피를 놓고 그 피를 옮긴, 깔깔거리던 우물가 뿔들. 처음으로 사슴피를 마시고 머리를 쳐들고 휘젓는 뿔에 온종일 속이 찔린 적이 있었다. 성질이 급하고 다혈질이 된 것도 그 피의 속성을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슴의 피에는 발굽이 있어 그 어떤 동물보다도 피가 빠르다. 관목지대를 어릿어릿 가는 사슴의 뿔엔 불안한 갈림길들이 있다. 사슴피는 중력을 거슬러 뿔의 꼭지까지 치솟다 뿔을 닮은 갈림길에서 주춤거리고 불안이 무뎌지면 나뭇등걸에 머리를 비벼 뿔을 벗는다. 뿔을 벗은 사슴은 한동안 자신의 온순한 피를 경계해야 한다. 뿔은 아름답지만 훗날 어떤 입에서는 험담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사람에겐 드문드문 나는 뿔이 사슴의 머리 위에서 늘 자라고 있었구나. 아, 저렇게 아름다운 화(火)도 있었구나. 뜨개질 남극의 펭귄들이나 인간이 하는 뜨개질은 엉키고 교차하는 일로 따뜻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어 고마울 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몸속을 뽑아내 얽고 엮어 먹고 사는 일을 하는 거미나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다 결구(結句) 짓는 까치를 보면 사람이 하는 뜨개질은 하수의 손재주에 불과하다. 명작들은 모두 다변한 감정들을 엮어 탄생했다. 또 어떤 결말들은 엉킨 실타래에서 실마리 찾듯 그 엉킨 매듭들을 기 어이 헤쳐 나온 뒤끝들, 그런 뒤끝들을 정답으로 사용한다. 가령, 넝쿨 들이나 줄기식물들은 얽히고설킨 힘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명 백한 정답들이다 엉킨다고 다 난제들은 아니다. 꿰매고 기워 가는 상처처럼 벌어진 사 이들은 오히려 엉켜야 아물게 되고 이심전심으로 꽁꽁 묶여 있는 것들 이 온갖 세력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또 자연을 구부리고 끊고 다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연명하는 일을 지켜 왔다. 태풍이 온다고 야단법석이지만 그 얽히고설킨 야단법석이 결국 무사 히 바람을 이기는 힘이 된다. 얽고 매듭지고 묶은 것들이 난제를 푸는 기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851상세보기 -
시·시조 엄원태 - 「허공이라는 것」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허공이라는 것 엄원태 화살나무 가지는 촘촘하다. 곤줄박이가 날렵하게 파고들어 꼬리를 까닥인다. 가지가 순간, 흔들렸던가. 수수꽃다리 가지는 성글다. 쇠박새가 무심한 몸짓으로 앉았다가 훌쩍 날아간다. 가지는 미동조차 없다. 곤줄박이 앉았던 자리보다 쇠박새 앉았던 자리가 더 말갛다. 조금 더 비어 있다. 비어 있던 가지였는데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야 더 말갛게, 헹궈 낸 듯 비워 낸 게 보인다. 새는 그렇게 저들의 자취를 허공에 남긴다. 생애(生涯)라는 건, 원래부터 비어 있는 단애(斷崖)를 비로소 마주하고, 온몸으로 통과해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새는 노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울지 않고, 다만 여문 부리를 깨물다 떠난 것으로 허공을 한 번 더 헹궈 낸 것이다. 세상 노래를 다 한 것이겠다. 구골나무 내 어릴 적 아버지는 임금님 풍채의 영락없는 큰 어르신이었는데, 돌아가실 적 마흔둘 아버지, 드물게 활짝 웃던 모습을 이제 마흔 넘긴 큰아이에게서 문득 본다. 아버진 참 젊게만 사시다 가셨구나. 어린 게 무슨 낚시질이냐, 못마땅한 안색으로 거창행 출장길 나서시던 마지막 모습만 남아 낮달처럼 가끔, 먼 공중에 떠 있곤 했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겠구나, 철들기 전에 그를 알아보기도 전에 떠나가 버리신 아버지. 세상 저 혼자 너무 늙어 버렸네. 공원 한구석 골골대는 저 구골나무는 풍파에 낡아서는, 이 추위에 때아닌 듯 꽃을 피웠구나. 이 땅의 전쟁과 기근, 재난 소식과 미세먼지 속에서도 더는 의미 없을 것 같은 희미한 향기를 찬 허공에 더해 보는구나, 그게 살아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도 된다는 듯. 이 동물원을 위하여·2 - 동물원 학교 나는 꽤 창의적인 분야의 선생이었으나 퇴직 후 노인대학 대신 동물원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굳이 좋아서 선택한 건 아니었는데 사회적 풍조 탓이라고 해 두어야겠다 설립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명성 드높은 역대 교장 선생님들의 희생과 봉사 덕분에 연예인을 능가하는 팬덤으로 무리를 이끌어 학교는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선생님들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실력이 출중하고 평판이 자자하신 분들이다 양 떼를 잘 몰아 유명해진 목동 출신의 전 교장 선생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 대신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끝내 집착하다가 마침내 승냥이 무리를 규합해 등장한 학생과장 세력에게 쫓겨났다 유혈목이를 목도리 장식처럼 두른 신령한 기운의 도움이 컸다는 후문이었다 소문은 곧 잠잠해졌지만 학교는 두 반으로 나뉘어 패가 갈렸다 서로 벤치마킹하면서도 서로를 비난하여 저주를 퍼붓거나 살점이 뜯기고 피가 나도록 물고 늘어졌다 학생들은 무조건 두 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짐승들이 창궐하는 세태를 맞아 이 동물원은 홍보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신입생들로 무진장한 자산을 늘려 나갈 것이기에 나는 이제 나라 따위를 염려해서 저출산 문제 같은 노인의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참 여러모로 대단한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80상세보기 -
시·시조 이진양 - 「미래 네모」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미래 네모 이진양 늪에 빠져 태양을 끌어안았어 하루는 바늘을 염원하는 풍선도 아닌데 모호한 것들의 편을 잘 가르는 아이는 가장 미래적인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살다 보면 공중분해되는 웃음도 있었고 목이 꺾여 죽은 바람에게는 가제트 팔을 선물해 주자 망가지면 다시 살면 그만이라고 다짐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쌓여 가는 성냥 더미 건물에 불이 붙습니다 외로운 나는 즐거운 펭귄을 생각하며 불타는 네모를 바라봅니다 긴 고민 끝에 조언을 구합니다 이 모든 사건이 장난인 게 들통난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텐데요 너는 자유로웠지 말이 어눌했거든 우리는 천천히 날아올랐다 날다 보면, 그렇게 한참을 웃다 보면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보호색을 띠는 아이도 보였다 내가 오지 않는 약속 장소에서 오펭 씨를 기다리는 나의 그림자 미래는 불충분했어 불필요하게 펭귄은 웃었어 거시적인 그래프로 보면 추락에 가까워지는 거지 얼음은 유령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말을 걸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가치가 있다 정적의 정점을 휘감으면서 초라해지고 있다 이렇게 흔한 혼잣말을 하려고 망상의 테두리로 춤을 추는 건 아니지 마주침은 억지로 몸을 뒤트는 싸구려 오르골일 뿐이어서 리듬을 바꾼다 뾰로통하게 뾰족뾰족 새침하게 늘 윤리 파괴의 눈빛을 실천하는 고물상 텔레비전의 몰골로 그림자 군, 오늘 밤 오펭 씨와는 잘 있었소? 그렇소, 당신은 잠시나마 안락의자로 머무른 것이오? 작정은 무엇이오? 작심과는 무엇이 다르오? 내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 주시오. 하지만, 알고 보면 오펭 씨는 노골적인 물고기 아니오?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분노를 숨기고 있었소? 그 분노는 투명이었소? 투명이었소 당신 앞에서 정말로 투명이었소 누가 누구에게 하는 질문이오? 새벽 333시 333분, 배후에 어느 누구도 남지 않은 그 관념에조차 미스터 오펭은 이글거렸소? 너무 차가웠소 닿으면 (사이) 정말 희나리가 될 것만 같았소? 그만하게 자네, 나의 말투를 빼앗지 말게나 왜? 어째서? 왜? 왜? 사람은 일방적인가 어째서 남겨진 오펭 씨의 얼굴을 대신 쓰고서 봉산탈춤을 배우면서 히득거리면서 무형문화재의 희귀성을 만끽하면서 (그건 가면도 못 되는 포장지에 불과한데도) 새벽녘 오펭 씨 나타나다 눈을 질끈 뜨다 바깥을 촘촘히 쌓아 올리다 구겨 신은 신발에 영원을 구겨 넣다 시선 없는 세계에서 대머리 독수리로 출몰하다 곧장 멸종을 만끽하다 희미해지며 다시 나타나 유령의 흐느낌으로 초면인 초인을 놀래키다 그러나의 계절이 들이닥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피자 한 판으로 담겨서 싸구려 팽이처럼 가볍고 위태롭게 돌아가다 처음으로 살 만하다 예쁘다 그러나 모조리 한가롭다 여전히 레몬 나무에는 레몬이 너무 많이 열려 있고 무럭무럭 열리고 있었고 공휴일의 사형식; 오펭 씨를 다시 만난다면 확성기로 귓속말해야지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게 파란 사이렌 터뜨리고 나불거려야지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빻은 유리 조각을 연료로 회전하는 싸구려
작성일 2022-09-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80상세보기 -
시·시조 유수연 - 「개평」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개평 유수연 조금 얻어 올 수 있었다 전부를 걸어 얻을 것은 좀 더 넓어진 의미의 전부였기에 내가 걸었던 것도 그것뿐이었다 국수를 삶는 어머니 국수를 삶는 냄비가 바글바글 끓는 저녁이다 검지를 엄지에 이렇게 동그랗게 말면 한 사람이고 좀 더 크게 동그랗게 말면 두 사람도 넉넉히 먹일 수 있다 운동회에서 아이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더 넓은 원을 만들고 가운데로 모이며 좀 더 작게 원을 만들어 낸다 커졌다가 작아지는 놀란 눈동자를 본 적이 있다, 내가 본 도형 중 가장 슬픈 정수리였다 일의 뒤에 줄을 세우면 숫자가 커졌고 커지다 못해 감당할 수 없었다 영의 뒤에 줄을 세우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다 먹을 수 없을 양도 먹다 보면 다 먹을 수 있다 그런 양을 다 해치우다 보면 못 이룬 꿈보다 가끔 못 먹은 밥이 생각날 수도 있겠다는 네 말이 생각난다 그 미련이 가끔 웃기는 저녁이다 분명 누가 굴러떨어지고 깔아뭉개지고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데굴데굴 무릎을 안고 있는데 엄마, 배고파요 그게 유언인 삶도 있는 저녁인데 부러진 소면은 배수구에 흘려보내며 아주 가는 분노를 생각한다 다들 걸러져 접시에 올리는 일 인분을 가졌고 다들 저녁 다음에는 아침이 있었다 믿음 조이기 잘 버티고 있다 그거 하나쯤이야 그거 하나쯤이야 사는 데 문제없으므로 자신을 버리고 싶은 생각을 겨우 참아 본다 모든 사람을 지우고 싶은 날 조용히 운동장을 도세요 이런 생각은 그만 접어 두자 말하며 이런 생각은 그만 잊어버리자 생각하며 운동장을 잊을 정도로 돌았다 잊으려 할수록 또렷해지면 대개 그 생각이다 그러면 주먹을 쥐었다 누군가 울면 따라 울 힘을 남긴 채 묻지도 않은 대답을 준비한다 날씨가 좋네요 같이 죽을까요 날씨가 좋네요 날씨가 좋아요 마주 오는 사람의 눈을 먼저 보았다 두어 번 주저앉았지만 일어나 마저 운동장을 돌기로 했다 미래라는 생각의 곰팡이 공동묘지엔 비공동체적 침묵이 존재하고 주인은 청설모, 너 차에 치인 청설모가 죽기까지 튀어 오르는 걸 본 이래로 붉음은 내겐 탄성을 가진 색 언제나 그렇듯 붉은 것 안에는 하얀 것이 있고 언제나 그렇듯 박살 난 몸에는 빨간 피가 있고 윗부분만 깎은 사과를 서로 나눠 먹는 동안 너무 익은 분말 같은 속살을 씹는다 여기에 온몸을 납작 엎드리는 인사는 누가 시작했을까 슬픔은 일종의 세레모니 승기를 올리듯 썩은 것엔 곰팡이가 피듯 시체는 깨진 체온계 붙잡고 종일 울 것 같지만 만지기도 꺼려지는 것 이미 부풀어 오르고 싹이 난 감자가 되고 살았던 것보다 길게 그런 긴 환상을 잊을 만큼 따분한 상태였다 시체에게 영혼은 철 지난 상상일 뿐이고 여름은 무성한 잡초를 키울 뿐이니까 도려내고 싶다 사과에 난 곪은 상처처럼 깨물어 뱉어 버리고 싶다 상자 밑 사과처럼 그만 멍들지 않게 남은 사람은 슬픔의 테두리를 도려내 버려야지 붉음 개가 꾸지 못하는 색깔의 낮잠처럼 살짝만 좌절하고 자는 개를 깨우
작성일 2022-09-0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31상세보기 -
시·시조 이기선 - 「별을 그리며」외 6편
별을 그리며 이기선 어릴 적 밤하늘은 5일장날 같았다 장터 복판길 같은 은하수 물길 따라 온 동네 별들이 나와 수다를 떨었다 밤새 반짝반짝 웃음꽃을 피우던 별들 어둠이 엷어지면 하나둘 집에 가고 해거름 시장통처럼 하늘이 비어갔다 아기 눈빛 같던 그 시절 뭇별들은 땅에 떨어져서 도시의 밤을 수놓고 하늘엔 폐광촌 불빛 같은 별 몇 개만 서성일 뿐 딸 바보 아빠의 기도 야근하다 새벽에 온 딸이 벗어 논 구두 흐트러진 두 짝을 가지런히 모아 놓으며 우리 딸, 고운 짝 만나 알콩달콩 살라고 서둘러 출근하느라 어질러진 딸의 침대 베개며 이부자리 반듯하게 펴놓으며 우리 딸, 오늘 밤에도 고운 꿈을 꾸라고 눈 내리는 밤 쥐들도 살지 않는 고향 집 마당에는 어둠 한 켜 적막 한 켜 눈이 내려 쌓이고 바람은 양철 차양에 앉아 시소 타고 있겠다 바람이 이따금씩 발을 구를 때마다 쌓였던 눈덩이는 절명하듯 떨어지고 눈가루, 썩은 마룻장에서 속울음을 울겠다 밤이 깊을수록 어둠은 희미하고 잠이 엷을수록 옛일은 또렷한 데 오늘 밤 내 꿈길에도 함박눈이 내리리라 양계장 닭의 독백 옛날 조상들은 바깥에서 살았다지 비 오면 나무 밑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더러운 두엄을 헤치며 먹이를 찾았대 우리는 복 받은 거야, 주인을 잘 만났어 날씨를 걱정하나 먹을 걸 걱정하나 밤에는 불까지 켜주잖아 자지도 말고 먹으라고 마스크 연가 앞에 오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철벽같은 마스크 위로 낯익은 고운 눈매 어디서 본 듯도 한데 누구더라 누구더라 내 심장 박동 소리 행여나 들킬세라 숨조차 멈추고 그 눈만 바라보는데 여인도 내 시선을 맞춘 채 머뭇머뭇 지나갔다 잔설(殘雪) -양로원 비가(悲歌) 암회색 세상에 축복처럼 내리던 눈 천지를 덮어주고 포근히 감쌌는데 길에서 질척거리자 천더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눈을 쓸어 구석에다 버렸다 외지고 후미진 곳에 쌓여있는 눈더미 흙먼지 뒤집어쓴 채 속울음을 울고 있다 봄비 들릴 듯 말 듯이 이별을 이야기하던 너의 목소리처럼 가녀린 떨림으로 차가운 대지에 내렸다 내 마음을 적셨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리라 깡마른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가슴에 메말라 있던 그리움도 싹텄다
작성일 2023-10-1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07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