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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 2024년 가을호(제47호)

시(詩)의 틈(間), 시간(時間)의 음(音)

민가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주요 논문으로 『김말봉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인물의 ‘광녀-대본’ 양상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가 있고, 주요 평론으로 「지금, 여기, 회색지대, 그리고 “빨강” - 이유리론」 등이 있다. 현재 《내일을여는작가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詩)의 틈(間), 시간(時間)의 음(音)1)



호모 클리마투스의 비유와 진실


  그동안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여기서 방점은 너무, 이 두 글자에 찍히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겨운 동굴 생활을 청산한 인간이 정착하여 부족을 이루고, 전쟁하고, 문명을 세우고, 또 허문다. 르네상스를 거쳐, 달나라 여행을 간다. 이 범박한 정리 너머, 너무나도 착실하게 호모 클리마투스homo-climatus가 되어온 인간은 1.45도 뜨거워진 지구, 20분에 하나꼴로 잃어온 생물종들을 보며 뒤늦게 읊조린다. 파훼되었다. 이제 “파종은 끝났다”(「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기후 위기’라는 진단도 점잖은 바야흐로 ‘기후비상’. 이제 우리 호모 클리마투스에겐 이런 일들이 남았다. 산호초, 극지방, 습지와 운무림의 생태가 사라진다. 킬리만자로 만년설이 녹는다. 해안과 강이 범람하고, 작은 도서 국가들이 가라앉는다. 2050년경 지구 식물종의 15~37%가, 2100년경 현존하는 동물의 4분의 1이 사라진다. 환경 난민이 되어 대규모 이주 행렬을 잇는다. 참신한 전염병과 온열질환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들어 번번이 진로를 방해한다. 식량과 물 안보 등 정치 어젠다가 부상할 때마다, 인간은 지론만 있고 지혜는 없는 자기 한계를 뼈아프게 실감한다. 플루토늄과 플라스틱을 위시한 인류의 희망(이었던 것)이 새 시대를 여는 강력한 지질학적 증거가 되어 돌아왔듯, 인류 문명의 기초 요소가 되어온 모든 도구가 인류를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결정적 한 방이 되어 귀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비유가 아니다.

  어쩌면 작금의 진짜 문제는 비유로 환원해선안될 각별한 진실에 비유를 들이밀어버린 데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이 상황을 타개할 것이라는 믿음, 그 견고한 믿음이 오늘도 착실히 쌓고 있는 멸망 크레딧, 그렇게 하나 둘 격파되어가는 티핑 포인트는 차치물론하고, 자기 작동 원리에 신실할 뿐인 ‘복잡계로서의 지구’가 인간에 ‘소외’되었다는 식의 비유가 통용되는 현실은 인류가 이미 자기 진단의 감각마저 상실했을지 모른다는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그저 ‘자연-권’을 행사 중일 뿐인 지구는 어느새 인간을 향해 이글대는 복수심을 주체 못하고 스스로를 불태우기 시작한 신파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있다. 이러한 소묘 방식에는 인간이 진지한 반성에 임하기만 하면 끓는점을 향한 지구의 질주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만용의 혐의가 짙게 깔려있다. 자랑할 역사가 기껏 만년도 안되는 인간이 자기 신분을 망각하지 않고서야 이토록 당당하게 오답을 내놓을 순 없다. 하루아침 모든 개체가 동시에 절멸하는 전격적인 사건으로 ‘멸망’을 이해하려는 손쉬운 믿음 역시 그 오판에 적잖은 몫을 보탠다. CO2와 N, 흙과 물, 빙하와 바다를 자기 악력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덮어두기식 믿음은 아쉽게도 단 하나의 사실만 덮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이렇게 또 다른 대타화 단계에 진입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 모든 진실과 비유, 믿음과 기만의 틈바구니를 면밀히 살펴보는 작업 아닐까? 무려 45억년 동안 쓰인 이 행성의 역사책은 연속 두 줄 이상 속 편한 문장으로 이어진 적 없는 ‘종말론의 필연’이었다.

우뚝 솟은 하나의 진실과 덧칠된 비유만으로 축약되기엔 너무 아득하게 오래인 ‘시간’이 이미 지구의 모든 존재를 선행한다. 이 사실은 다시금 무언가를 믿어보고 싶게 만드는 용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기를 ‘이로써 인류가 희망을 확보했다’거나, ‘인간의 책임 우선성을 회피해도 괜찮다’는 식의 이해로 비약하면 곤란하다. 과거 다섯 번의 대멸종과 지금 도래 중인 여섯 번째 대멸종의 차이 - 인간이라는 내부요인이 그 멸종의 압도적 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 - 까지 사상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번 멸망이 인간이 직접 경험 중인 첫 번째 멸망이라 해서, 혜성 충돌, 대륙판 이동, 화산 폭발로도 완전히 장악되지만은 않은 지구의 시간성까지 절하할 순 없다는 말이다.

  시를 비롯한 예술은 이런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마다 대안적 가치로 호명되어왔다. 그러나 당장 육박해오는 ‘자본 난민’의 위기 앞에서 ‘기후 난민’의 공포는 상대적으로 멀어 보이고, 그 겨를까지 비집고 들어가기에 오늘날 시의 존재감은 이미 너무 희박해진 것 같다. 또 시의 미학성은 실리를 염두하는 방식보단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벌려내며 발생한 간극에서 주로 출몰하기에, 독자의 생태적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선전도구 되기를 자처하지 않거니와, 두려움을 환기하는 ‘공포의 발견술’ 되기는 더더욱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니 더러는 백 줄의 시구보다 단 한 줄의 1.5도 라이프스타일 운동 구호 제창이 더 긴요해 보일 때도 있다. 하물며 문학장이 각종 인류세 담론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시를 읽는 우리가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세상의 일들이 그리 많아진 것 같지도 않다. 당장 러브버그와 모기 포비아로 잠 못 이룬 우리의 여름밤을 떠올려보면 때때로 이 모든 이야기가 너무도 고아한 별나라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조 : 배음의 정치, 포네의 시간


  이 멸종의 시간을 같이 버티어 줄 만큼의 가치가 아직 문학에 남아있다는 게 이 글이 당도하고자 하는 거친 결론이다. 이는 곡진한 사유의 결과보다 차라리 간절한 선언에 가깝다. 그간 다수의 기후문학 논의가 최소한의 윤리적 혹은 당위적 선언을 배제하지 못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채택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주목해봄직한 논의로는 임태훈의 논의2)가 있다. 임태훈은 그간 “모든 비인간 존재들을 압도해 최상층 위계에 올라”서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온 재난 서사와 기후 소설이 엄연히 구분됨을 짚어내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기후변화의 준원인”이고 “온갖 사물 간의 얽힘과 스며듦도 연루되어 있”기에 클라이-파이Cli-fi의 역사적 과업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재차 생각하”고 “미래의 비/인간/형을 발명하는 일”에 있다고 제시하였다. 또한 “소중한 삶의 터전으로 간주되는 자연을 더 이상 현대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태적 아노미”의 징후를 포착하고, 2020년대 기후-시의 개념을 “자연을 투명하거나 실체가 없는 하나의 기후나 계절로 표현하는 일군의 작품”으로 정립한 박동억3)의 논의 역시 무력한 인간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던져야만 할 근원적 질문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 기후 문제를 범지구적이고도 행성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킨 SF의 성과 역시 같은 맥락 안에서 이해해봄직하다.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경향을 벗어나 시공간을 재구성하고 다양한 비판적 사고실험을 통해 비인간과 인간을 얽어놓은 SF 장르는 이미 인류세를 지나는 문학장 내 강력한 정동의 매개물이 되었다. 물론 저 먼 바깥 우주를 향한 인간의 도피를 촉발하며 “땅으로부터 뿌리는 뽑아내고 또 다른 전좌를 초래”하거나, “파멸을 ‘가정적 미래’로 연기시”키는 작업들이 객체를 향한 인간의 무감함을 심화4)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SF가 인간의 자기-준거성이 세워온 ‘사회적인 것’들의 토대를 허물고, 재구성하며, 물질의 귀환을 촉진해온 것은 주지의 활약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SF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밀착과 긴장”을 내포한 모든 매체를 포괄하는 “서사 예술의 한 형식”5)이라 했을 때, SF시란 무엇이며 타 매체의 SF적 형식으로부터 변별될 수 있는 시적-서사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된다. 장르별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과학 기반의 허구를 통해 ‘지금-여기’에 일어날 법한 것을 구조화하는 것이 SF 서사의 기본 공식이라면, 우리가 시에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SF적 상상력은 결국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연대기적 나열로부터 시간을 구출해내는 것, 요컨대 낯선 시적 대상의 본질 밑에 놓인 새로운 시간성을 발견해내는 일 아닐까? “은유의 강력한 결합적 양식으로서의 시”6)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머나먼 시간성을 지금-여기의 필연으로 땋기에 가장 넉넉한 장르인 까닭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맥락에서 “모든 텍스트의 원천은 결국 시간을 감각의 형식으로 붙잡아보려는 안간힘”7)이라는 말과 함께, 시간이 2차원 아닌 3차원(전후, 좌우, 상하)의 입체적 흐름을 따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자문하고 자답해 온 신해욱의 시를 살펴보자. 신해욱의 시는 늘 예정된 미래대로 흘러가기를 최대한 망설이며 다른 시공에 자신을 옮겨놓기를 기꺼이 택한다. 이 흔적들을 보기 위해 먼저 우리 시간의 스케일을 ‘시분초침’ 단위에서 ‘자연사’ 단위로 확장해보자.

  시인의 근간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에는 동일한 제목의 표제작이 총 네 편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자면 “자연의 가장자리로부터 다시/맨발로 나타”난 인간이 ‘남’의 그늘, 양분과 자유를 누리고 ‘남’이 베푼 망각의 은혜에 과하게 도취되어온 역사 그 자체이다. 이 네 편을 이어 붙여보면 흡사 한 편의 대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자신이 지구의 밭에 심은 무허가 작물을 보며 그것이 ‘불로초’냐는 인간의 우문 그리고, 그 찰나에 깃든 “영생의 기분”은 자연의 생몰에 관여해온 인간의 방식이 얼마나 허위로 가득한지를 되비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 번째 표제작 속 ‘우리’는 불을 “우리의 불”로 인식하며 그것을 “비로소 일렁이는 것, 비로소 따뜻한 것”과 같은 주관적 인식 하에 소유한다. 그들이 자기 바깥으로부터 낚아채온 종자로 번식해온 인간의 ‘의존의 역사’는 두 번째 표제작 속 ‘파종’의 계절에 이르러 다음 선언과 함께 중단된다. “파종은 끝났다.” 뒤이어 시인은 서너번째 표제작 속 ‘첫눈’과 ‘봄비’의 계절을 경유하여 인간이 자기 인식적 경험의 저장고에 축적해온 모든 것에 그 고유의 소유격을 되돌려준다.


“눈이 왔다 첫눈이었다

우리는 유성생식을 했다

무허가의 시설로부터 다시
우리는 맨발로 다시 태어나

맨발은 추위의 것
시간은 미래의 것

(……)

손바닥을 보았다 바닥은 검댕의 것
손금은 생명의 것

창밖을 보았다 소멸은 눈송이의 것
부재는 빈 집의 것

(……)”
ㅡ 세 번째 수록된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부분


“비가 왔다 곡우였다

거름은 나무의 것
모이는 새의 것

우리는 먹이를 먹었다

자연의 가장자리에 들어
먹이는 우리의 것
우리의 먹이를 먹었다

촉촉하구나 촉촉하다
촉촉한 등은 개구리의 것
촉촉한 흙은 지렁이의 것
미끄러지며 목을 넘어가는
먹이는 우리의 것
누가 먹던 우리의 것

(……)

거름은 나무의 것
삶은 자연의 것

못물은 모의 것
촉촉한 혀는 우리의 것

(……)”

-네 번째 수록된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부분


  이 모든 대서사시의 방점은 결국 “미래는 시간의 것”이라는 문장에 찍히며, “죽은 동물의 냄새”를 풍길 뿐인 인간이 논하는 ‘영생’이 얼마나 ‘음담’에 불과한지를 넌지시 드러낸다. 그러니 이 네 편을 연속적인 흐름 안에서 읽는 것은 시간성에 대한 인간의 오해를 바로잡는 시인의 작업으로 보아야한다.

  신해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규칙을 고안해 틈을 벌려내본다. 「카운트」 속 “하나에서 열까지”를 계수 중인 화자는 ‘우리’를 “선험에 갇힌” 채 “못 한 것의 못 함에 붙들리는 영벌에 처해진” 존재요, 그 “영벌에 걸맞은 잘못을 두고두고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소묘한다. 이 때 “우리의 열은 뜨겁고” 그 열은 “생활의 열보다 빠르”다. 숫자를 도통 천천히 셀 줄 모르는 인간에게 세상은 분열, 증식의 오류, 뒤척임, 섣부름과 같은 혼란의 필연이다. 계수의 명령에 따라 “세라는 대로 열까지” 고분고분 수를 세는 동안 인간의 미래는 “차례차례 곪아갈 것”이고, 이 때 자기 세계와 허구를 연결시킬 모종의 틀을 전혀 고안해내지 못한 인간은 “전생을 못마치고 미리 깨어난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반면 더 이상 ‘카운트’ 하지 않고 ‘구구단’을 통해 “하나에서 열을 만드는 놀이(「구구단」)”를 하는 세계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놀이란 “둘은 사라지게 하고/당장에 셋을 낳고/넷을 잃기로” 하거나 “다섯과 여섯 사이에는 일곱과 여덟을 만드는” 등 자신이 직접 “숫자가 되어”가는 놀이이다. 숫자가 만들어지고 또 사라지고, 낳아지고 또 제거되는 과정은 1부터 10까지의 세계가 끊임없는 유동상태에 의해 증식되는, 요컨대 ‘구구단’이 “생물로 가득”한 ‘생물성’으로 빚어지는 과정과 나란히 놓인다. 인간이 실재를 과학적으로 부호화하고자 만든 ‘계수의 법칙’이 그린 결말과 ‘구구단’의 결말은 그 결을 달리한다. 수는 자신이 수량화하는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 정작 ‘카운트’를 추구하는 건 세계의 모든 것을 시간의 선후와 그에 따른 인과로 설명하려는 경험론자들과 그들의 협소한 과학주의이다. 그들이 가진 “맹목의 질료들을 있는 그대로 구원하는 일”(「클론」)에 관심 없는 시인은 「파훼」에 당도해 그 경험들을 찢어내는 방식으로 “경험의 틈”을 벌려낸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자기 허구의 세계, 즉 자신의 시를 깃들게 할 뿐이다.


“(……)삼각자에 찔려 경험론자의 경험이 대신 찢어지고 경험의 틈이 벌어지고

벌어진 틈으로 미지의 액체가 콸콸 흘러 흙이. 숲이. 습함이. 병듦이.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여름은 비참하게 길고 병듦이. 붉음이. 시듦이. 슬픔이.

보잘것없는 상념이. 건조불멸의 시름이. 어지러운 빈혈의 마음이.

깜부깃병에 휩쓸린 보리밭이. 개구리밥에 뒤덮인 연못이. 향토색에 찌든 자연이.
(……)”

-「파훼」 부분


  그동안 근대적 세계관은 삼각자의 정밀한 수치, 치밀한 눈금, 날카로운 계산을 통해 차이를 빚고, 그 차이를 근거로 양자가 대립하는 세계를 구축해왔다. 근대 이성이 “찾지 못한 깊이”에 의해, “부러진 삼각자에 찔려”, “잘못 깊어진 것들에 의해”, 그리고 “잘못 찾은 깊이”에 의해 세계는 줄곧 ‘파훼’되어왔다. 그 때 시신도, 유족도, 곡소리도 없이 장례를 치르던 삼복염천의 상갓집(지구) 속 시인은 이성과 비이성의 ‘틈’을 재차 벌리고 그 안에 “누가 잡초를 움켜쥐고 통곡”하는 소리를 발생시킨다. 그러니 이제는 몸을 활짝 젖히고, 들을 귀를 겸비한 채로 ‘포네phone’들의 시간을 맞이하면 된다.

  시각 중심주의가 우리의 형이상학에 깊이 스며드는 동안, 인간은 시각적·과학적 번역에 의해 세계를 지성의 대상으로 해석해왔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다른 생명존재와 공유하는 ‘비음성’을 잊어버린 우리는 명료한 언어를 취하지 않는 모든 소리를 너무 쉽게 ‘헛소리’로 여겨왔다. 세계라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대한 세심한 청각적 번역을 방기하며 줄곧 굴러온 역사 안에서, 신해욱은 마치 잠수함의 산소 농도가 떨어지는 것을 제일 먼저 감지해내는 토끼처럼 인간의 가청권내에선 감지할 수 없는 신호들을 포착한다8). 마치 바탕음 속 배음처럼 신해욱의 시적 상상은 문장이 되지 못한 묵음들, 유의미하게 발화되지 못한 포네들을 시어와 시어 사이에 삽입해낸다. “말씀에 섞인 광물의 소리. 파문을 일으키는 폐수의 소리”(「비굴착식 승강형 맨홀보수기계장치」)에의 자처가 바로 그것이다.



조율 : 묵음의 크레센도


  신해욱이 절단된 시간의 파편들을 잇대는 성실한 직조공이라면, 윤혜지는 비가시화된 죽음 안에서 잊혀진 시간들을 건져 올리는 예민한 조율사이다. 윤혜지의 그것을 읽노라면 시 한편이 채 전개되기도 전에 엉겁이 흐른 느낌에 당황하게 될 것인데, 독해를 반복하면 행간을 잇는 시인의 사인파가 개인 단위에서 가늠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을 뛰어넘어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제일 먼저 윤혜지가 소묘하고 있는 멸망의 오늘에 주목을 요한다. “피와 빵과 비누 따위를 얻기 위해 수도꼭지든 뭐든 다 팔아먹고 거리로 나온” 아파트의 사람들, 그러나 “더 이상 팔아먹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아파트의 “또 무엇을 떼어 낼까 골몰”하는 얼굴들은 자본의 명령에 과잉-충성해온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학’에 다름 아니다. 작중 ‘굴착기’라는 표상은 자기가 세계를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한 곳으로 빚어냈다 착각하지만, “모든 것을 으스러뜨”리며 “쇠와 쇠가 부딪히는 냄새”로 진동하게 만들어온 경제와 생산, 기술과 개발의 논리를 표상한다. 이 ‘굴착기’에 의해 “파헤쳐지는 침묵”이란 세계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굴착해온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묵음 형태의 멸망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사로잡힌 세계」).

  아울러 「모든 것을 내려놓은 고양이」 속 “불이 난 광경을 쳐다보며 하나둘 덧문을 닫는 우리의 이웃들” 역시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 파편화된 우리의 생을 보여준다. “조각 케이크 같이 나눠진 세계를 믿는 자들”이 이 모든 대지를 경제 생산의 질료로 여기며 그것들을 자기 맘껏 분화시켜도 되는 대상으로 여겨온 ‘망상의 공동체’를 영사한다. “몰두일까 외면일까”에 대한 시인의 물음 앞에, 이 모든 ‘불구경’이 사실은 가장 차가운 ‘냉담’이었음이 드러난다. 우리가 몹시도 몰두해온 것들의 결과가 이제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부조리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 안에는 이렇게나 무거운 진실이 매립되어있다. 우리의 직관과 직감이 보내고 있는 위기감, 이 묵음의 경고는 이미 크레센도로 너무 많은 것을 말해왔다. 게다가 시인의 이러한 질문에는 인간이 스스로 각성하거나 구원하는 메시아가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땅은 결국 자신의 시간과 아상(我相)대로 그 모든 계획과 무계획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의 가장자리를/걷는 사람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줍는다

혹은 죄악 혹은 돌과 나무조각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두고
탐색
작은 것들을 옮겨 담는다

모래를 밟고 서서 물을 바라보는 건 낡고 근사하다 첫눈에 대해 말하는 노인들 같다
계절이 시작되면 그들은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상하지, 오래된 사람들은 늘 처음을 말하고

조개 줍는 사람들 곁에 앉아 조개에 붙은 모래알을 털어냈다 해안가 침식이 심각합니다 너도나도 모래를 퍼가서요 멸종은 조개가 아니라 모래에게 도래한 것 같아요

저기
온갖 것을 묻힌 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갔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다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 속에 손을 넣는다

모래를 퍼내면 모래는 느리게 밀려간다 더 깊은 곳으로

평범한 것들이 마음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등 뒤에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사건을

잠깐 쥐었다 놓아도 쥔 감각을 놓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집에 가면
목이 긴 유리컵에 조개껍질이 한가득이다
그것을 관상하다, 같은 어려운 말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골라 따뜻한 국물 속에 넣고
죽은 것의
숨구멍끼리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야지 생각했지만 곧 잊혔고, 모두가, 물가에 있었던 기억마저도 쓸려가고, 수심이 깊어져 이제 아무도 조개를 줍지 못할 곳까지 모래는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빈 곳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그런 적이 있었지 하기도 전에 각자가 멸종되고

무너지는 것도 반복이라고

노인들도 죽고 이제 눈 이야기 해줄 사람도 없다 처음을 발음 할 사람도

- 「음악 없는 말」 전문


  “지나간다 지나갔다”거나, “닿았다 떨어진다”거나, “쥐었다 놓는”다거나, “생각했지만 곧 잊혔다”는 공허한 진술의 반복이 이 시에 환기하는 주된 분위기는 잡히지 않을 것처럼 희미하고 허망한 정서이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주으며” “물의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것은 현재요,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오래된 사람들(노인)”이 살아내고 있는 것은 과거라 가정하고, 이 희뿌연 시공간 배경과 시적 대상들을 교차시켜보자. 그럼 생명의 밀물과 썰물이 모든 것을 영점으로 되돌려놓는 풍광과 포개어질 것이다. 조개와 모래의 멸종, 그리고 이 생몰의 무한한 작용 옆에서 “그런 적이 있었지”라는 진술이 채 종료되기도 전에 “각자가 멸종되고//무너지는” 흐릿한 장면은 “노인들의 죽음”과 함께 까마득한 미래로 순식간에 이동한다. 이제 그 곳에는 “눈 이야기 해줄 사람”과 “처음을 발음할 사람”조차 없다.

  이 급격한 미래로의 전환은 시 안에 등장하는 ‘온갖 것’들을 관찰 중인 화자의 정체를 되묻게 만든다. “관상하다, 같은 어려운 말로 쓰지는 않을 것”이라는 표현만 보아서는 경외심을 갖고 무언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온갖 것’들의 생몰을 미리 간파하고 있는 절대자로 보이기도 한다. 관찰이나 사유를 제외하고 시 속 화자가 하고있는 동적행위란 무언가를 “잠깐 쥐었다 놓는” 행위, 즉 ‘장악(掌握)’이 유일한데, 무언가를 손안에 잡아 쥐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장악’은 이 화자가 마냥 평범하고 단순한 관찰자로 배치되지만은 않았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쥔 감각을 놓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화자의 진술은 그것들을 손아귀에 잡아 쥐는 화자의 태도가 마냥 성급한 거나 폭력적이지만은 않아 보이고, 나름 슬로우모션의 윤리를 고수 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닳은 돌들을 “함부로 쌓지 않고 바다로 던져버리고” “그것의 고리에 영영 붙어 있을 흰 그림자”가 “헤엄치는 모습”을 끈기 있게 지켜봐주는 「희고 흰 빛」 속 화자의 태도에서도 관찰된다.

  이 절대자는 세계가 “땅속 기름과 가스파이프 같은 것들에 의존하는 미적 구성체”9)라는 사유의 확장을 유도한다. 즉 세계가 바깥에 노출되어있는 구조물보다 매립되고 감춰져있는 메커니즘의 작용에 의해 영위된다는 사고를 촉구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윤혜지의 화자 역시 매끄러운 지구 표면 위로 드러난 벚꽃의 탐스러움을 향해 “진짜 아름다우면 도리어 가짜”라 말하는 반면, “아름다움은 죽은 것들의 몫”이라고 말한다(「작은 종」). 시인이 포착중인 아름다움은 정녕 이런 것이다. 현실의 지평 아래 고여 있는 죽음들 – 가령 “화약과 산딸기와 죽은 짐승이 타는 냄새”, “냄새를 뿜으러 천천히 떠다니는 죽은 별들” - 이 그것이다. 요컨대 시인은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죽음, 무언가의 내부에 고여 있는 것들 안에서 다만 세계의 진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 가득한 벽을 수집하는 사람이 고고학자만 있는 건 아니”라는 문장(「큰 동물의 작은 뺨」)처럼, 윤혜지는 매립된 진실의 발굴을 시인된 자신의 본령으로 관철시킨다.

  서로 전혀 다른 결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앞선 신해욱의 파동과 윤혜지의 파동은 서로의 위상을 보강하며 그 진폭을 확대한다. 그들이 공명하는 지대는 ‘생명이 소음의 필연’이라는 믿음의 지대이다. 무소음은 우리 청각을 본능적으로 불편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반면, 백색의 소음에 둘러싸인 순간 우리 귀는 비로소 이완된다. 이러한 소음의 세계에 활자 예술을 대입해보면, 시는 우리의 가청권과 시간적 인식 바깥에 존재하는 잊혀진 소리들의 귀환을 촉진하기 위해 스스로 백색 소음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백색소음이 “감각의 대상” 아닌 “감각의 조건”, 즉 “소리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소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10)이 되듯, 시 역시 세계의 진실에 의해 죽지 않으면서도 세계에 진실을 던지기 위한 조건이 된다.



순연 : 멸망 속 유머레스크


  앞선 윤혜지를 비롯한 젊은 시인들의 근래 시편들 속 유감없이 발휘되는 묵시록적 상상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SF시, 기후문학, 생태문학의 타이틀을 자처하거나, 시어에 위압적인 기후 현상과 인간의 심적 위기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 않아도, 그들의 시는 종말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 성찰을 완곡한 방식으로 던진다. 다만, 구원과 종말, 생과 죽음, 천국과 지옥의 교차 아래 등장하는 그들의 절대자 형상은 모두를 멸하러 온 심판자나, 구하러 온 메시아도 아니요, 세계의 멸망에 가슴을 찢고 포효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경유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심장한 의미를 던진다.

  그 중 한여진의 시 「힐튼호텔」(《자음과모음》 2024 봄호)에도 석가모니 이후 세상에 내려와 모든 중생을 구제한 절대자 미륵보살이 등장한다. 영업이 종료된 호텔에서 “결국 미래가 오고 말았다”는 말과 함께 깨어난 미륵보살은 아무도 없는 텅 빈 호텔의 곳곳을 돌아보며 생명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처를 향해 말한다. “당신도 죽고 당신의 약속도 죽고 구제해야 할 중생도 없는” 이곳이 어쩌면 “너무 늦게 도달해버린/천국”.

  이렇듯 모든 게 절멸해버린 공간에서 천국을 발견한 미륵보살은 “처음으로 살아 있는 몸”이자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 존재가 되고, “부처가 되지 못한 자신의 얼굴”에서 엉뚱하게도 “애틋한 것, 어여쁜 것, 수줍은 것, 가여운 것, 어지러운” 한낱 마음들을 읽어낸다. 이 ‘마음’의 정체는 대관절 무엇이건대 한여진의 시적 주체들이 그것을 찾아 부질없이 헤매게 할까. 이는 「내일 날씨」 속 ‘화자’와 ‘기린’이 나누는 대화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는데, 과거(“지금과는 달랐”던 날씨)-현재(“이전 같지 않은” 날씨)-미래(“오늘과는 분명 다를” “내일의 날씨”)라는 선형적 시간 매트릭스 안에서 화자는 자신이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이미 여기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화자가 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다음 수록작 「검은 절 하얀 꿈」 속 “겨울이 도착하고 있는” ‘절’과 ‘꿈’으로, “죽지 않고 도착”한 그곳에서 화자는 “곧 내가 찾는 것을/찾게 되리라” 예감한다.


“(……)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은 조용하고 둥글다 그것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색을 띤다
그것은 불타오르며 깨진다 그것은 눈을 감는다 침묵한다 그것은 알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둥그런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자주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되었다가 나를 이 절로 보낸 사람이 찾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절에 있다 그것은 이 절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절 마당에 있는 연못도 아니고 연못에 기울어진 버드나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울어진 버드나무를 더 기울게 만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
내가 찾는 것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이 되는 그것은 불빛 그것은 굴러가는 토마토 그것은 이국의 사람들이 마시는 뜨거운 홍차 그것은 향기 그것은 허기 그것은 치통 그것은 늙은 개의 얼굴 그것은 울리지 않는 전화벨
그것에 손을 가져가면 순간 사정없이 깨어져

무수히 많은 파편들은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르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

-「검은 절 하얀 꿈」 부분


  “하얀 눈/정지한 세상/고요하고 무궁하게” 존재하는 꿈결 속에서 그녀가 찾아낸 “무수히 많은 파편들”, 즉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르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 그것, 동시에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그것은 앞서 살핀 시 속 미륵보살에게 도달했던 마음 -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 그것과 - 나란히 놓인다.

  이렇게 마음을 찾아 헤매는 인물들의 여정은 「겨울소설」 속 “살려고 쓰는 나와/쓰기 위해 산다던 너”의 존재에서 구체화된다. 작중 귤 농장에는 “혼나지 않기 위해 귤을 따야만 했던” 추억을 공유중인 ‘나’와 ‘너’가 있다.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오늘도 쓰고 있는” 그들은 “귤 한 알 열릴 때까지/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가늠 중인데, 여기서 그들의 ‘쓰기’는 무언가를 기록하고 집필하는 행위뿐 아니라,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소모하는 차원의 행위까지 포괄하며 중의성을 띠게 된다.


“어제와 엊그제와 모든 삶이
거대한 기록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
침대보엔 마른 귤껍질들이 뒹굴었고
우리가 속삭인 비밀들을 먹고 자란
귤나무는 다음해 무엇을 피워낼까

(……)
마을 너머에 살던 어른들이 찾아와 항의를 했지
귤을 먹었더니 글쎄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게 됐다나

그건 귤껍질의 흰 속살처럼
달걀의 속삭임처럼 병아리의 마음처럼
작은 너와 나의

이야기들이었지
시키면 팔꿈치를 핥고
독뱀을 잡아 멀리 풀어준 일을
어떤 나무는 악취 탓에 뽑히기도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도록 태어난 사람의 운명을
모든 여행자는 끝내 정착하고 만다는 사실을
가여워하던 너와 나의 전부가

속속들이 까발려지고
노래가 되었는데 그래도
끝나지 않던 얘기들

농장 주인에게 흠씬 맞은 날
황금빛 알갱이 같은 눈물이 툭툭 쏟아지고

다 때려치우고 글이나 쓰며 살고 싶다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무를 키워내고 또 귤 한 알 열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쓸 수 있는 것과
써야만 하는 것

그런데 사람들은 쓸모없는 건 돈 주고 사지 않는데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우리가 그럴 수 있니
귤을 까서
서로의 입에 넣어준다

(……)
다 때려치우고 따듯한 귤이나 되고 싶다 생각한다“

-「겨울소설」 부분


  “이런 건 상품 가치가 없다”는 어른들의 말과 “쓸모없는 건 돈 주고 사지 않는” 사람들의 말이 논하는 쓸모의 경제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려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 “속삭인 비밀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틔워낸 귤나무와 “작은 너와 나의/이야기들”로 틔워낸 한 알의 귤은 “서로의 입에 넣어”지는 순간 “끝나지 않던 얘기들”이 된다. 이 식목 작업이 형상화하는 시간-쓰기, 글-쓰기, 이 모든 걸 종합하여 ‘계속 쓰-기’가 틔워낸 상징적 결과물 ‘귤’ 한 알이며, 이 하나의 실과(實果)는 결국 한 편의 시가 된다.

  창작을 향한 작가 자신의 고백처럼 읽히는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를 통해 논의를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작중에는 “자신만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을 만들며” 남을 죽이는 방식으로 오래 살아남아온 남자 형상의 절대자가 등장한다. 또 “쓸모 있어지기 위해” 노래, 시, 그림과 소설을 만드는 ‘원숭이’, 그리고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을 만들겠노라 다짐한 화자(‘나’)가 등장한다. 이 몽상 공간 속 ‘원숭이’는 화자의 분신으로 보이며, ‘원숭이’의 결과물은 자기 목적(쓸모)을 달성하지도, 절대자의 그것을 능가하지도 못한 채 소진되어버린다.

  반면 ‘나’는 “낮과 밤/밤과 낮//그 틈 속”을 몸소 경험한다. 그리고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은 평생 시차에 시달린다”는 사실과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생체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리고 이는 ‘나’의 창작 동기의 변화로 이어진다. 다음 인용을 확인하라.


“(……)
그리고 생각한다.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 그리고 오래 살았다는 남자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될 나의 미래를”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 부분


  직접 ‘시간의 틈’을 언급하며 그 안에 놓인 “진짜 이름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즉 잊혀진 것들을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직접 언명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실상 시인 자신의 맹랑한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동시에 “오래 살았다는 남자”, 즉 절대자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될 시간”을 “나의 미래”로 선포하는 대목은 당당함을 넘어 도발적이다. 꿈속에서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던 초월자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화자의 방식은 기존 묵시록 계열의 시편 속 무력한 화자들의 형상과 엄연히 구분된다.

  이 외에도 「Beauty and Terror」 속 “번지는 불길 앞에서 우리는 곧 재가 될 사람들”이라는 진술이나 “아주 먼 훗날//자 여기 이런 것이 있었다”는 진술이 참담한 기후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결말이라도 당신과는 나누지 않겠다”고 신에게 선포하는 화자는 비극적 관념론의 감성적 분신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요컨대 한여진에게 ‘죽음’이란 “당신은 당신의 결말을 향해 우리는, 우리의 결말을 향해” 가는 일이고, ‘삶’ 역시 “너는 너의 일을 하”듯이 “생은 생의 일을 하는 것”(「터널 지나기」, 《자음과모음》 2024 봄호)에 불과하다.

  대신 한여진은 “어딘가에 들러붙어 까만 얼룩을 남기는” 존재들이 드리운 현재성의 그림자 속에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에 하나의 “까만 얼룩”을 새겨주기 위해 먼저 죽음을 향해 앞질러갈 뿐이다. 우리가 이 종말을 모면할 방도는 없지만, “구원을 기도하는 고전적 비극의 장엄한 레퀴엠” 되기를 거부하는 이 ‘가벼움의 감응’은 자신이 무엇을 남기고 죽어야 할지에 대한 통렬한 고민을 토대로 써내려간 “반음계주의적 ‘유머레스크’11)”이다. 「겨울소설」 속 “쓸 수 있는 것과 써야만 하는 것”에 대한 시인의 곱씹음 역시 멸망 안에서 시인이 자기 시적 세계를 어떻게 주파해야 할지에 대한 내면의 고민이고 응답이다. 미리 종말의 시간을 상상함으로써 현재를 연장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면, 미리 종말의 시간을 삶으로써 종말을 순연해보려는 자들이 있다. 여기서 한여진의 시는 명백히 후자이다.



씀의 씀씀이 : 짜고 맞추고 잇기


  안정된 기후가 영속될 것이라는 믿음, 매끈한 과학 진술과 기술이 예고하던 해피엔딩……. 이 모든 전망이 사실은 인간의 지독한 오해였음이 드러났다. ‘의사 진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진술 심지어는 사이비 진술로 곡해되어왔던 시의 시간도 현실과 허구, 진실과 비유가 뒤섞이는 세계의 극공에서 되찾아진다. 아니, 되찾아진다는 말보다는 줄곧 거기, 내재적이고 시간적인 객체들의 레퓨지아로 존재해왔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다만 지금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은 종말이 확정된 순간에라야 문학의 효용도 극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단발성의 믿음보다, ‘계속 쓰-기’를 통해 진실 아닌 진리를 꾸준히 입증하려는 시간성의 믿음일지 모른다. 들을 귀 없는 곳에서 ‘계속 쓰-기’를 향한 믿음을 붙드는 일이 너무 쉽게 ‘문학의 불가능성’이나 ‘무용론’으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진정성에의 주창이 ‘소박한 자기 변론’이라는 오해로 직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 그에 못지않게 공식화할 토대를 잃어버린 ‘진정성’에 대한 근본적 차원의 고민도 요구된다. “더 크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본연의 모습이 되는 과제에 있다”12)는 공식 앞에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이 결국 ‘자기성’, 즉 ‘인간성’에 있다는 식의 오해는 곤란하다. 석탄의 힘을 전면에 걸고 내달려온 식민주의 정치, 편리와 효용을 구호로 걸고 줄곧 작동해 온 경제의 뿌리를 파헤쳐보면 결국엔 세심하지 못한 ‘진정성’의 논의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는가. 또 자연, 비인간에 대한 지나친 개념화, 대상화가 역설적으로 다른 담론을 지배하며 발생해온 또 다른 진정성의 왜곡도 논외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바다거북과 북극곰이 인간과 대립하고 있긴 한 걸까? 자연과 지구는 반드시 조화와 협력으로 채색되어야만 하는 관계인가? 이 기후 격변이 곧 비인간의 정치적 복수이며 연결성의 회복만으로 상당 부분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도 결국엔 기후에 적응할 방법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려는 인간의 욕망 아닌가?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멸망 안에 비멸망이, 종말 안에 구원이 이미 들어가 서로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한다. 동시에 이 모든 물음은 비인간의 행위소가 되려는 우리 열망이 결국 또 다른 주체의 답습 아닌지에 대한 통렬한 자기 점검과 나란히 놓여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의 기후 문학이 지구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는 모종의 투시주의를 자처하며 지구를 주어로 삼고, 스스로 그 주어되기를 자처하는 식의 공회전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 행성은 항상 각양각색의 생명체,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 여겨져 온 것들이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뒤섞고 각축해온 과정 그 자체였다. 그 모든 과정과 담론을 선행하는 유일한 명제가 ‘시간’이라면, 시인은 당김음의 작용 안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 지나간 선율 속에 지속 중인 ‘지금’의 진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결정의 음을 기대하며 당겨쓴 ‘미래’13)의 틈에서 시작(詩作)을 매일 새로이 시작(始作)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의 파동과 마찰로 짜인 한 편의 론도. 초저주파와 저주파에 흩어진 자모음을 잇대어 만든 한 편의 교향곡. 나는 그 선율이 시와 다르다면 또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신해욱, 한여진의 시집은 다음과 같다. 신해욱,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년.; 『syzygy』, 문학과지성사, 2014년.;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년.;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봄날의책, 2024년.;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년.; 윤혜지의 시는 이하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을 참조한다. 『시보다 2022』, 문학과지성사, 2022년.; 『시소 두 번째 : 2023 시소 선정 작품집』, 자음과모음, 2023년. 이하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작품명만 표시한다.
  • 2) 임태훈, 「기후소설cli-fi를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 3) 박동억, 「생태적 아노미와 기후시」, 『현대시』 2023년 7월호.
  • 4) 티모시 모턴, 『하이퍼 객체』, 김지연 옮김, 현실문화, 2024년, 212쪽.
  • 5) 이지선, 「트리니티의 오펜하이머와 코펜하겐의 하이젠베르크」,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175-178쪽.
  • 6) 최진석, 「행성의 시학: 인류세와 기후위기 시대의 시적 조건들」, 『한국시학회 제52차 전국학술대회 논문집』, 한국시학회, 2023년, 60-68쪽.
  • 7) 신해욱, 『창밖을 본다』, 문학과지성사, 2021년, 22쪽.
  • 8) “(...)우유를 먹고 자란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지붕 위에 던진 젖니를 모아/차근차근 탑을 쌓아보면 어떨까//(...)그런 탑의 꼭대기에 까마득히 서서/젖니를 혀 밑에 숨긴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모르는 이야기에 닿으면 좋을 텐데.//내 목에는 묵음들이 가득 고여 있으니까.//묵음들 속에는 생각이 없으니까.//내가 놓친 소리들이 가청권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뮤트」)
  • 9) 티모시 모턴, 앞의 책, 216쪽.
  • 10) 신해욱, 앞의 책, 16-17쪽.
  • 11) 이진경·최유미, 『지구의 철학』, 그린비, 2024년, 408-410쪽.
  • 12) 찰스 귀논, 『진정성에 대하여』, 강혜원 옮김, 동문선, 2005년, 19쪽.
  • 13) 에드문트 후설, 『시간의식』, 이종훈 옮김, 한길사, 1996년, 87-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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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계간 시작 박형준 체험만남풍경마음마을사 2024
나희덕 [문학평론]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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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탄생하는 예술가와 그의 붉은 몸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계간 현대비평 강지희 AI예술비가역적 시간붉은 몸성해나혼모노김지연하와이사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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