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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청색종이 | 2024년 여름호(제12호)

청소년이라는 서발턴과 새로운 영어덜트 시 : 청소년 문학의 현재와 미래

김지윤 문학평론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시)과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2년 시와시학상을 수상했고, 쓴 책이 2013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와 202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피로의 필요』를 출간했고, 학술·비평서 (공저) 『한국 현대문학의 쟁점과 전망』, 『요즘비평들』외 다수의 저작이 있다.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은 말할 수 있는가?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와 학교는 중요하지만, 없어야 할 존재다. 니콜라예바는 서구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 혹은 교사를 포함한 ‘부모 대리인’은 인물을 부정하거나 방해하는 무능한 존재로 등장한다면서 이것이 아동청소년 인물을 성장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고통”이자 “불가피한 불행(inevitable evil)”의 무대라고 표현되었던 ‘학교’는 대체로 부조리하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학교는 서구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대개 주변적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1)


    그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와 학교의 존재감은 매우 크며 근대 가족, 제도, 학교 시스템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는 유교 사회부터 내려온 사회적 이데올로기, 오랫동안 한국에서 강력하게 작동해 온 국가주의, ‘입시’라는 목표 하에 청소년의 삶이 교육제도에 포섭되는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로 인해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은 오랜 시간 보수성을 견지해 왔고, 교양 담론적 성격도 강했다. 

    한국에서 1930년대 이후 중산층 핵가족이 이상적 가족 모델로 제시되며 아동은 ‘보호’의 존재로 위치2) 지어졌다. 아동이 가족 내 위계에 맞게 ‘피보호자’의 위치로 배치되는 과정에서 소위 “어린이다움”이 고착되는 과정을 거쳤고,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고 규제하며 사회와 국가의 규범을 전수시켰다. 공교육은 국가의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와 공조해왔는데, 청소년 문학 역시 이 과정에서 “청소년다움”을 형성했다.3) 이로 인해 한국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가족, 학교가 문학의 전면에 드러나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고 ‘어른’들이 개인의 성장을 돕거나 가치관이 형성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거나 작품 속 주체, 화자가 되곤 하였다. 어린이 청소년이 화자인 경우에도 사실상 “어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말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2024년인 지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청소년 독자의 정체성, 출판의 지형도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오세란은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청소년소설의 형식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청소년다움”을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위 ‘청소년다움’의 보수성과 대립하여 “언뜻 진보 담론을 펼치는 듯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조차 일종의 ‘청소년소설다움’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4) 

    이융희는 청소년 소설이 2000년대 초, 그림책과 판타지 동화를 읽은 어린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갑작스러운 입시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는 비판적 인식 하에 등장했으므로 사실 청소년의 현실을 돌아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소위 ‘어른’이라고 불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화자 집단”이 기성세대가 만든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결국 문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을 강화한다고 비판5) 했다. 

    오세란은 근대 사회가 형성될 때 요구되었던 단일한 정체성이나 성장, 사회화 같은 가치가 이제는 자신의 다양한 내면을 깨닫는 것으로 변화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근대 사회에서 청소년은 미성년이자 주변인으로서 어른들이 원하는 서사를 수용해야 하는 존재였다면 이제는 패턴화된 성장, “온건한 경청자로의 유도”가 공식처럼 되어 버리는 문학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6) 

    그렇다면 청소년이라는 ‘서발턴’은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스피박 식으로, 이렇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인지적 구도를 통해 청소년을 재현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 말하는 것을 듣자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청소년은 기존과 매우 다른 존재들이며, 2010년대 이후의 시대의 급속한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랐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지금 여기’의 새로운 세대의 경험과 인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는 어떤 시대였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침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이중적 위기를 겪으며 세계 질서가 전진의 행보를 멈추고 뒤로 물러서는 ‘거대한 후퇴’7) 라고 요약할 수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이를 악화시켰다. 고립과 정체(停滯), 우울과 불안의 팬데믹을 겪으며 사회 곳곳에 위기가 심화되었다. 

    2010년대부터 2023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사람들을 무력감과 공포로 밀어 넣었고, 사회는 양극화되고 사회통합은 약화되었다. 많은 분야에서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며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퇴보가 이루어지고 사회의 부조리함은 깊어지지만 개인의 무력함은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감시자본주의8) 가 일상을 장악해 간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인구감소, 환경파괴와 이상기후, 연금위기,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위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중위기 앞에 놓인 현실 속에 있다. 칼부림 사건과 같은 이상동기 범죄가 불안을 격화시키는 등 사회의 병적 현상들을 지켜보고,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는 가운데 지금의 청소년들이 꿈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통계결과로도 드러난다. 2020년 학생 희망 직업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중등 대상 조사임에도 1위부터 10위까지의 희망 직업 중에는 교사나 군인, 공무원 등의 안정적인 직업, 의사와 같은 고소득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9) 자신의 내적 동기나 희망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한 시대에 안정성 높은 직업을 선택하라는 사회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 휴대폰 소지로 상시 연락이 되고 보호자가 자녀의 위치 추적, 동선 파악까지 할 수 있게 된 기술 발전이 그들을 옭아맨다. 또한 저성장과 계층 사다리 붕괴, 대졸자 증가 등으로 인한 기회의 감소, 높은 청년 실업률 때문에 경쟁이 심화된 현실 속에 놓여 과도한 선행학습 요구와 그에 따른 스케줄링에 소진되며 성취 압박에 시달린다. 스틱스러드와 존슨은 지금의 부모들이 자

녀들에게 사소한 일들의 취사선택부터 하루 일과의 계획, 심지어 장래희망까지 간섭하는 ‘과잉육아’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지나친 통제와 과열되는 경쟁, 게임과 SNS 중독, 불안과 스트레스로 인해 아동청소년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다양한 임상 사례, 연구를 통해 보여 주며 최근 문제시되는 청소년 번아웃과 우울증 등의 문제를 ‘삶의 통제력 부재’에서 찾는다.10) 가혹한 입시현실 속에 놓인 한국에서 이러한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그러나 현실과 불화하며 대응해온 문학의 방식으로, 지금의 아동청소년아동청소년 문학은 다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 그것을 넘어서 보려 한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의 아동청소년들은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다. 디지털원주민이자 포노사피엔스로 불리는 세대이며 소위 ‘디지털이민자’이거나 아날로그 세대인 ‘어른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이 경험과 경륜을 통해 줄 수 있는 지식과 정보, 지혜보다 더 많고 더 구체적인 것들을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부터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연장자의 지혜에 의존 하기보다는, 오히려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뒤처진 기성세대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잘 살아갈 방법을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만약 기성세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낡은 구태의 방식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강요한다면 강한 저항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소위 ‘세월호 세대’이며, 미투와 세월호 사건 등을 겪으며 ‘어른’들이 신뢰할만한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였고,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며 사회의 구태와 민낯들이 드러나는 것을 목도했다. 가족과 사회가 충분한 보호망이 되어 주지 못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여실히 경험했다. 그리고 학교가 그리 견고한 제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팬데믹 시기의 유연한 학사제도,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는 교실의 풍경을 많이 바꾸었고 곧 실시될 고교학점제는 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어른’을 지워 버린 빈자리에 홀로 서서, 청소년들은 이제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청소년 문학의 변화


    니콜라예바는 ‘성장기’란 아동문학의 근본적인 내용11) 이라고 말하며 아동문학을 거울-문학으로 이해할 때 사회를 비추고, 인간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동청소년 문학은 어떤 거울이 되고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대로 비추는 평면거울이 아니라.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는 다면체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제도권 국어/문학 교육 하에서의 읽기가 ‘주제 찾기’의 강박에 시달리게 만든 까닭에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주제’는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다면적 해석이 가능하여 단일한 주제를 갖는 대신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다른 주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확고한 주제의식 아래 의도된 교훈의 프레임을 제시하는 대신, 다양한 관점과 틀을 벗어나는 사고를 권한다. 

    또한 ‘사회를 비추는’ 기능에 있어, 거울의 선명도가 확연히 높아졌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최근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지금까지 금기시되어 온 청소년의 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기도 하고, 다문화, 디아스포라, 페미니즘, 성 소수자, 빈부격차 등을 심도 깊게 다루는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최배은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아동청소년 문학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하며 2016년 10월 미투운동이 시작된 이후 201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아동청소년 문학장에 있었던 페미니즘에 입각한 작품비평과 토론에 주목12) 한다. 평론가들은 “동화를 쓰는 여성작가, 페미니스트 작가”13) 라고 선언한 이현의 작품이 여성의 욕망에 대해 고찰하고 『그날 밤 우리는 비밀을』(우리학교, 2018)에서 다섯 명의 여성작가가 ‘몸’이라는 키워드 하에 십 대 여성 청소년을 탐구하는 것에 주목했다. 청소년소설은 ‘스쿨미투’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교사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두 소녀의 용기』처럼 근래 일어난 실제 사건들을 환기시키게 되는 리얼리즘적 방식으로 스쿨미투의 현장을 보여 주기도 한다. 국립극단 어린이. 청소년글연구소가 개발한 창작 희곡집 『여학생』(배소현 외, 도서출판 제철소, 2017)에서처럼 “여성청소년의 욕망과 불편을 폭로하고 들려” 주기도 한다. 

    청소년에게 허용되는 이야기와 그들이 실제 즐기는 이야기 사이의 간극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청소년들의 현실과 그들이 원하는 바를 ‘허용된 청소년 문학’이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공적으로 발화되지 못한 욕망이 이중적이고 폐쇄적인 그들만의 장에서 표출되는 현상이 가져오는 문제14) 도 존재한다. 최배은은 웹 플랫폼 등에서 청소년에게 제공하는 이야기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허용하는 이야기 간의 차이가 커질수록 유해한 콘텐츠로부터 청소년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자신들이 향유하는 이야기의 작품성을 온당하게 인정받지 못한다면서 2019년 8월 포항의 한 중학생이 라이트노벨을 읽다가 교사가 ‘야한 책’을 읽는다며 급우들 앞에서 체벌하자 투신자살한 사건을 언급하고,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하고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제대로 비평하는 일이 긴요15) 하다고 강조했다. 김지은도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소비자인 아동청소년이 독자로서 느끼는 책에 대한 고민이나 소감 등이 생산자인 어른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고, 생산자 역시 자기 작품이 아동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확인할 수 없기에 아동청소년 문학평론이 필요하다면서, 아동청소년이 느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어른들이 없는 사이에 어른들로부터 해방됐던 순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동청소년 문학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6)

    일반적으로 청소년 문학은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여겨져 왔으나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무거운 주제의식, 핍진성 강화,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며 동시대를 호흡하고 진화해 나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문학과 청소년 문학 간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이는 청소년들이 관심을 갖는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이며, 실제의 청소년들이 변화한 까닭이기도 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작금의 청소년들이 기존과 매우 다른 세대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멀티미디어와 폭발하는 데이터, 과잉 소통, AI가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고 2010년대 이후의 현실을 경험하며 자랐다. 기존의 청소년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성경험 평균연령도 해마다 낮아지고 있고 디지털성범죄가 확산되며 n번방 사건처럼 청소년이 피해자에 포함되는 사건들도 증가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일어나는 사이버폭력에도 노출되어 있다. 자연히 그들이 느끼는 욕망, 문제의식, 불안의 양상도 변화하게 된다.

    청소년 인권행동모임 ‘아수라노’,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위티’, “누구나 스스로 위기를 말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기후 운동단체를 표방하는 ‘청소년 기후행동’과 같이 사회변화를 위해 직접 참여하는 모임이 생기고, 청소년 활동가들이 증가하는 것도 직접적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싶은 청소년들의 욕구가 증대되었음을 드러낸다.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그간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도 폭넓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성소수자의 사랑을 무겁게 그려낸 『오, 사랑』(조우리, 사계절, 2020), 퀴어-되기의 서사를 담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이필원, 사계절, 2021), 청소년 임신과 십대 미혼모를 다룬 『두 번째 달, 블루문』(김고연주, 창비, 2017)과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 그동안 청소년 문학에서 금기시되었던 주제를 진지하게 정면 돌파하며 다루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세란의 지적17) 처럼, 미성년인 아동청소년들에게 비극적 세상의 전망을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없어 청소년 문학이 인간과 세상을 성찰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순간 문학 정신이 부재한 자리를 당위적 교훈으로 메꾸게 될 위험이 발생한다.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이를 과감히 벗어나 사회의 부정성을 그대로 보여 주려 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이미 세계의 비극성에 눈뜨고 있고, 실제로 많은 문제가 청소년들의 삶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발생되며 경험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 문학에서 당사자성이 높아지고 있음도 다수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청소년 문학은 “독서생태계, 사회문화 지형도, 청소년독자의 위상과 밀접히 소통하며 변화를 거듭”18) 한다. 따라서 이 모든 변화들을 폭넓게 살펴보아야 변모양상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작가군의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문학의 작가군은 전보다 넓고 다채로워졌으며 신인 작가들도 대거 등장했고, 일반문학과의 구분도 희미해져 더 다양한 작품이 창작될 수 있게 되었다. 청소년도 여러 경로를 통해 쉽게 자신의 글을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동청소년들이 자신이 소비하는 콘텐츠에 대한 비평과 감상을 공유하기도 쉬워졌다.

    실제 청소년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곳도 많아졌다. 국내 최초로 ‘어린이 심사위원제’를 도입한 스토리킹, ‘청소년들이 직접 선정하는 청소년 문학상 프로젝트’(청문상 프로젝트)와 같이 아동청소년들이 직접 후보도서를 읽고 선정해 심사하는 문학상들도 늘어나고 있다. 스스로 읽고 싶은 콘텐츠를 결정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아동청소년은 능동적인 소비주체로 등극하게 되었고 청소년독자의 위상은 확연히 변모되었다. 

    청소년들에게 청소년의 언어로, 청소년들의 니즈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플랫폼인 북틴넷 (bookteen.net)과 같은 곳들도 늘어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읽고 싶은 주제나 내용을 담은 책을 찾아보고, 원하는 책을 요청하기도 하며 관심 있는 도서를 SNS에 담거나 공유할 수 있다. 북틴넷에 공개된 소개글에 따르면, 청소년은 도서 큐레이션의 모든 이미지(포스트와 썸네일)를 만들고, 게스트 큐레이터로 책을 소개할 수 있다. 

    그간 한국 청소년 문학에서 “‘온건한 경청자’가 목적화되었”19) 던 이유는 오세란의 지적처럼 청소년 문학이 교과서에 거의 실리지 않는 제도권 국어교육과 청소년 문학의 괴리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김은하의 의견처럼 외국과 비교해서 우리 교육과정에서 자기 서사 쓰기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20) 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서사화하고, 자기 생각을 직접 발화하는 글쓰기를 시도하는 예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문학장에서 청소년은 어떻게 새로운 읽기와 쓰기의 주체가 되어 가고 있을까?


영어덜트 시와 새로운 주체들


    청소년 문학에서 그간 시는 사실 잘 다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작가’는 친숙해도 ‘청소년시작가’는 낯설게 느껴진다. 청소년 문학=소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창비청소년 문학상’은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미발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창비와 카카오페이지가 함께하는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역시 소설만을 대상으로 한다. 

    청소년 문학은 경계인으로서의 ‘청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청소년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관점과 이해 가능한 미학적 형식으로 풀어놓은21) 것을 의미한다. 청소년 시도 이러한 개념 설명 속에 충분히 포함되나, 청소년 소설은 2000년대 이후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데 비해 청소년 시라는 장르는 여전히 낯설고 청소년 시집은 드물게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금씩 청소년 시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조짐이 보인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높아지면서 감정과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 자기만의 표현과 언어로 발화할 수 있는 시 장르에 대한 선호가 생기기 시작했다. 

    청소년이 주로 10대까지를 의미한다면 영어덜트는 성인기 전반의 사람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제 청소년 문학과 성인문학의 경계가 전보다 흐려진 현실 속에서 ‘영어덜트 시’라는 표현이 ‘청소년 시’보다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청소년 시집들이 기성시인들이 청소년을 위해 쓴 것들인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 청소년 시인들이 낸 시집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한 예인 김소희의 『열여섯 팔레트』(지식과감성#, 2023)는 실제 열여섯 살인 시인이 쓴 청소년 시집이다. 열여섯 소녀의 불안, 우울, 기쁨이 진솔하게 표현된 시집에는 청소년기를 실제로 관통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으로 본 세상이 색깔 이미지와 함께 펼쳐져 있다. 

    한국의 공교육과 입시 제도는 교실을 매우 억압적으로 만들고, 학생들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성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정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성인초기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곤 한다. 이는 계속 누적된 문제가 되며,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고통받는 20대가 5년 새 각각 127%, 86% 폭증했다는 심평원의 통계22) 에서도 드러나듯 우리 청년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열여섯 팔레트』는 청소년 자신이 시적 주체가 되어 자신의 심리와 상태를 스스로 돌아보는 시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인 자신도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급하게 움직이는 시간에 끌려다니면서 허겁지겁 살다 보니”(4쪽) 일어나게 된 일들을 담담하게 되돌아보고 시에서 자신의 감정에 색깔을 붙인다. 행복은 초록색, 불안은 보라색, 우울은 파란색, 희망은 노란색이라는 식이다. “바닷속 물고기들이 행복해 보여도/결국 모두 상어에게 잡아먹히고 말걸// 나는 바다로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여기가 편해/ 가만히 있어도 밥을 주고/ 가만히 있어도 깨끗한 물로 바뀌거든// 나는 바다로 가지 않을 거야”(「어

항 안 물고기」)라고 좁은 시야 안에 머무르며 자발적으로 미래의 가능성들을 수거해 버리는 삶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내 그림을 완성할 수 있기를/ 나 말고도 세상의 모두가 그렇기를”(「열여섯 팔레트」)하고 기도하며 경쟁을 넘어 “나 말고도 세상의 모두”를 생각하며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살되 연대를 모색하려는 자세를 보여 주기도 한다. 

    영어덜트 독자들의 시에 대한 관심도 전보다 높아졌다.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성질을 지닌 정서의 잠재태이자 정서적 이미지”23) 인 ‘정동’을 담아내거나 찾아보기에 적합한 장르가 바로 ‘시’이며, 독자들은 시를 통해 스스로를 더 이해할 수 있고, 내면의 감정을 발산할 수 있다. 시인이 남김없이 말하지 않고 남겨둔 빈자리에 자기 경험과 감정, 상상력을 채워 넣고자 하는 영어덜트 독자들이 확연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20대 독자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각종 지표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최근 시집 구매 통계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20대 독자의 약진이며, 예스24 집계 결과를 보면 최근 6년간 시 종합 분야 및 한국 시 분야에서 전체 구매자 중 20대 구매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시 종합과 한국 시 분야의 20대 구매자 비율이 2018년 7%대와 비교했을 때 2023년 14%대로 2배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24) 이는 청소년들이 20대에 진입하며 시집 구매 독자층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위 집계 결과상 2023년 한국 시 20대 베스트셀러에서는 2010년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대거 상위권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시 분야의 중요한 독자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20대가 세대적 공통분모를 가진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경험과 감정, 신선함에 공감하고 몰입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1세기의 변화와 사건들은 그 이전 세대와 잘 겹쳐지지 않는 지금의 영어덜트들의 특성을 형성했고, 그들은 기존과 다른 경험과 감각,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이 처해 있는 시대에 대한 동세대적인 공감대를 원한다.

    이에 따라 영어덜트들의 고민과 처해 있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지영 시집 『최고는 짝사랑』(쉬는시간, 2023)은 쉬는시간 청소년시선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미 청소년시집 『넌 아직 몰라도 돼』, 『해피 버스데이 우리동네』 등을 펴낸 바 있는 신지영 시인은 이 시집의 42편의 시를 통해 다양한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재기발랄함, 명랑함, 귀여움 대신 이 시집 속에 불안과 두려움, 무기력이 가득하고 쉽게 위안이나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이 시집의 청소년들은 무기력해 보인다. 그들은 억압되어 있거나 붙들려 있고 정체되어 있다. 그들은 연약해서 “손으로/ 꾸욱/ 누르고// 발로 살짝/ 짓이겨도/ 뭉개진다// 참 쉬워/ 너 같은 아이”(「잎」)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냉혹해서, “여름은 남의 탓/ 차가운 비명이 도로 위에 익어” 가고. “미처 건너지 못한 고양이 한 마리/ 무늬처럼/ 눌려 있다// 썩기 전에 말라붙어 버린 눈알 위로/ 길 잃은 파리들이 내려앉는다”(「한심한 여름」)고 묘사되는 끔찍한 장면이 그저 ‘한심’하게 치부된다. 그러나 죽은 고양이를 보며 청소년 시적 화자는 “자라지 못하는 것들에게 마음을” 준다.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멈춰 있는 중”(「모범수」)이기 때문이다. 

    “무엇도 망치지 않고/ 누구도 아프지 않지//아무도 상처 입지 않는 사랑/ 최고는 짝사랑!”(「최고는 짝사랑」)이라는 말은 사실 ‘상처 입히고 망가뜨리는 사랑’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반어적 표현이다. 한국 사회의 아동청소년들은 많은 것들에 속박되고 입시 제도 안에 갇힌 채 시스템 안에 규율된 존재들이다. 이 시집 속 아동청소년 인물들은 부조리, 방임,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아래 놓여 있고 무의미하거나 억압적인, 때로 폭력적인 일상 속에 멍들고 상처 입은 모습이다. 이 시집의 2부 “파벨라의 고양이”에서는 아이들은 안전장치 없이 “파벨라(브라질의 빈민촌)”와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나는 깨진 아이//누구도 붙여 주지 않았다.”(「깨진 아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삶은 “뭉개진다는 거 참 쉽더라 (…) 이리저리 치이다/ 속이 다 터져버려/ 뭉개진 내가// 쓰레기통에서 누군가 버린 하루가 썩어가는지/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벌레들이 몰려든다”(「내 자리는 어디에」)는 식으로 그려진다. “세상이// 뺑글/뺑글// 돌아/ 돌아// 작은 방에 한데 엉켜서// 마구/ 마구를 맞은 것처럼”(「빨래」) 어지러움을 느끼며 “어느 날은 나보다 부쩍 커져서/ 언제나처럼 표정은 숨기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 “나보다 더 나같은 어둠”(「그림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문제 없다고// 거친 말처럼/ 나 세상에게 달려갈 뿐인걸”(「말 있는 말」)이라고 말하며 삐뚤어져도, 어긋나서도, 망가져서도 자라난다. 신지영 시인은 시집 끝의 산문에서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벌어진 채로 흉터가 되지 못해도 아이들은 자신을 키워낸다.”라고 쓴다. 미화되지 않은 사실적 고통, 날것의 불안과 어두운 현실, 두려운 미래가 그들이 ‘성장’ 과정에서 마주치는 현실이며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

    지금의 영어덜트 독자들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소극적 독자가 아니라 시가 창작되는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최근 독자들이 시를 향유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는데, 이 역시 20대 독자들의 증가와 관련된다. 

    시를 자기 방식으로 읽고 편집 및 공유, 큐레이션까지 하려하는 적극적인 젊은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점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변화에는 소셜미디어의 활성화가 큰 역할을 했다. 이 독자들은 시를 SNS에 올리며 자신의 독서 취향을 공유하고 소통하려 한다. 

강윤정 문학동네 편집부장은 2024년 상반기 문학동네 시인선 판매량 1위를 차지한 고선경의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의 성공을 두고 “SNS에서 10대, 20대로 추정되는 독자들 사이의 입소문만으로 꾸준히 판매된 인상적인 사례”25) 라고 말했다. 김민정 시인은 “흩뿌려진 시구와 단어에서 일부만 취할 수 있는 시는 특히 인스타그램 시대에 독자를 주체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장르”26) 라고 보고 있다. 

    ‘청소년 문학’은 새롭게 점검되고 고찰되며 그 외연이 확장될 필요가 있고, 그에 대한 비평 역시 더 진화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영어덜트들은 새로운 읽기 주체와 창작 주체로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영어덜트들의 일상과 문화, 감각은 이미 한국 현대시에 스며들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 문학에 대한 검토와 논의는 더욱 활성화되어야 하며 새로운 미래 주체가 될 영어덜트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며 그들의 진짜 목소리가 담긴 작품들이 창작되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들의 감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앞으로의 문학에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2010년대 중후반 시집들이 “세월호 이후 처음 등장한 세대의 첫 발화를 목격”27) 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던 것처럼, 이들은 문단의 새로운 창작 주체가 되어가고 있고,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이미 문학장 안에 들어와 있다.

  • 1) 마리아 니콜라예바, 조희숙 외 역,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 교문사, 2014, 104~105쪽.
  • 2) 이재경, 『가족의 이름으로: 한국근대가족과 페미니즘』, 또하나의문화, 2003, 111쪽 참조.
  • 3) 오세란, 「청소년소설 속 아이들은,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고 싶다」, 『어린이와 문학』 2016년 7월호 참조.
  • 4) 오세란,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 문학의 세계』, 사계절, 2021, 59쪽.
  • 5) 이융희, 「순문학이란 없다 2」, 웹진 《텍스트릿 TEXTREET》, 2019. 9. 7.
  • 6) 오세란, 앞의 책, 2021, 133쪽.
  • 7) 사회학자 김호기의 표현이다.(김호기, 「굿바이, 2010년대!」, <경향신문>, 2019.12.1.)
  • 8) 하버드 대학 교수 쇼샤나 주보프의 용어로,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는 인간 행동이 만드는 데이터를 기업이 직접 수집해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 9) 『초·중등 진로 교육 현황 조사』, 교육부,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20.
  • 10) 윌리엄 스틱스러드, 네드 존슨, 『놓아주는 엄마 주도하는 아이(‘자기주도성’은 ‘성공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 11) 위의 책, 124쪽.
  • 12) 최배은, 『오래된 백지』, 소명출판, 2024, 137쪽.
  • 13) 이현, 「나는 여성 작가입니다」, 『창비어린이』 여름호, 창비, 2017, 70쪽.
  • 14) 최배은, 앞의 책, 225쪽.
  • 15) 위의 책, 같은 쪽.
  • 16) 송석주 기자, “[인터뷰]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어린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조금씩 자랍니다”, <독서신문>, 2020. 3. 3.
  • 17) 오세란, 앞의 책, 2021, 169~170쪽.
  • 18) 위의 책, 81쪽.
  • 19) 김영희·김은하·오세란·김건형 대담, 「독서들로부터- 페미니즘과 청소년 독서 교육 현장」, 『문학동네』 봄호, 2021 중 김건형의 말.
  • 20) 위의 글.
  • 21) 오세란, 「청소년소설의 장르 용어 고찰」, 『아동청소년 문학연구』 통권 6호, 2010, 149쪽.
  • 22) 박양명 기자, “우울한 20대, 우울증·불안장애 5년새 127%·86% 폭증”, <메디컬타임즈>, 2022. 6. 24.
  • 23) 김금내, 「시 텍스트 감상에서 독자 정동의 교육적 접근 방향 탐색」, 『한국문학교육학회』 75, 2022, 47쪽.
  • 24) 김태완 기자, “오늘은 “세계 시의 날”… 최근 6년간 20대 시집 구매 비율 늘어”, 『월간조선』, 2024. 3.21.
  • 25) 오경진 기자, “인스타그램 시대, 詩가 변했다… 한없이 가볍고 감각적으로”, <서울신문> 2024. 7. 16.
  • 26) 위의 기사.
  • 27) 김소연. 김영찬. 백지연 대담,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 비평』 2016 여름호, 442쪽 중 김소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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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계간 시작 박형준 체험만남풍경마음마을사 2024
나희덕 [문학평론]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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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탄생하는 예술가와 그의 붉은 몸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계간 현대비평 강지희 AI예술비가역적 시간붉은 몸성해나혼모노김지연하와이사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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