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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아동문학평론 | 2024년 봄호(제190호)

작고 여린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 ― 박화목 동화론

박상재 문학평론

* 전주고등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전공(문학박사) * 1981년 <아동문예> 동화 신인상, 1984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동화 당선 * 제2차 세계아동문학대회 집행위원장(서울임페리얼호텔), 2023 세계방정환학술대회 조직위원장(서울 프레지던트호텔), 2024 세계방정환학술대회 조직위원장(수원 컨벤션센터) * 한국아동문학학회 회장(역임),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역임) 한국교원대 겸임교수, 단국대 대학원 외래교수 역임 * 현재 한국아동문학학회 자문위원, (사)한국아동문학인협회 고문,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아동문학사조> 발행인 * 새벗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한정동아동문학상, 박경종아동문학상, 김영일아동문학상, PEN문학상, 이재철 아동문학평론상, 생명과문학 작가상 등 수상 * 저서: 이론서 <한국창작동화의 환상성 연구>, <한국동화문학의 탐색과 조명>, <한국동화문학의 어제와 오늘>, <한국 대표아동문학가 작가작품론>, <동화시의 매력>, <동화 창작의 이론과 실제>, 동화: <도깨비와 메밀묵>, <영웅레클리스>, <꽃이 된 아이>, <하지아저씨와 삽살개> 등 140 여권

 Ⅰ. 들어가는 말

 

  은종(銀鍾) 박화목(朴和穆)1924215일 황해도 황주군 장천리(긴내 마을)에서 부친 박승환과 모친 이덕환 슬하의 43녀 중 여섯째(3)로 태어났다. 기독교1)를 믿는 그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는데, 백부는 장천리에서 큰 과수원을 경영했다. 그의 부친은 그가 어렸을 때 평양으로 이주하여 양복점을 경영했다. 평양에서 초중등학교를 마치고, 1942년 평양 신학교 예과 및 본과 2년을 졸업했다. 1943년 중국 하얼빈 영어 전문학원에서 공부하고, 1945년 만주 선양시(봉천) 동북신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그후 월남하여 한신대 선교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문단 이력을 보면 1939년 어린이 잡지 <아이 생활>에 동시 겨울 밤, 1941년에 피라미드가 추천2)되었다. 박화목은 광복 직전 중국에서 귀국해서 평양 근처의 누나 집에서 기거했다. 당시 북한의 상황이 기독신앙을 가진 그가 살기에 적절치 않음을 깨닫고 19462월 선배 아동문학가인 함처식3)과 함께 월남을 결심한다. 한밤중에 걸어서 삼팔선을 넘은 그는 여관에서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며 동시 「38도선」4)을 썼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이 작품을 윤석중이 펴내던 월간잡지 <소학생> 현상공모에 응모하여 당선되면서 공식적으로 등단하게 된다. 당시 백 원이라는 상금도 받아 수중에 돈이 없던 그가 서울에 정착할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문예담당 프로듀서로 일하며 동인지 <죽순(竹筍)>5)과 시지 <등불>의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1950년 한국일보 문화부장을 역임했고, 1952년 도서출판 민교사 편집국장을 지냈다. 1954년부터 기독교방송에 입사하여 교양부장 및 편성국장을 지내다 1971년에 퇴사했다. 1980년부터 10년동안은 서울신학대학 강사를 역임했다.


    박화목의 연보를 바탕으로 출간한 작품집을 동화집과 동시집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화·아동소설집은 밤을 걸어가는 아이』(소년 소설집, 1954), 『부엉이와 할아버지』(1955), 『꽃팔이 소녀의 그림』(1963), 『저녁놀처럼』(1970), 『눈 소녀』(1974), 『램프 속의 소녀』, 『비바람 속의 아이들』(소년소설집, 1979), 『마징가의 꿈』(1981), 『현주의 봄 여름 가을 겨울』(1981), 『얼룩 염소의 모험』(장편 동화, 1982), 『개똥벌레 삼형제』(1983), 『인형의 눈물』(1987), 『아파트 소녀와 나비』(1988), 『아기별과 개똥벌레』(1988) 『욕심많은 개구리』(1990), 『잃어버린 나비』(1990), 『무지개를 타고 온 아이』(1991), 『내가 잃어버린 무지개』(1993), 『꽃별이 된 떡갈나무』(1994), 『꿈을 먹는 나비』(1994), 『다리부러진 인형』(1994) 20권이다.

  동시집은 초롱불』(1957), 『꽃이파리가 된 나비』(1973), 『아이들의 행진』(1978), 『봄을 파는 꽃가게』(1981), 『봄 그림자』(1985), 『아파트와 나비』(1989) 6권이다. 출간한 작품집의 권수로 단순비교해도 알 수 있듯이, 박화목은 동시보다 동화를 훨씬 많이 창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많지 않은 아동문학 작품론이 동시에 국한되어 있음은 추후 연구자들이 참고해야할 사항이다.  

  그가 받은 문학상으로는 제4회 한정동아동문학상(1972), 기독교문학상(1975), 대한민국문학상(1978), 한국전쟁문학상(1990), 서울시문화상(1989),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1994), 황희 문화예술대상(1999), 국제문화예술 협회 공로상(2000) 등이 있다.

  문단활동으로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아동문학위원을 비롯하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중앙위원,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숙희와 결혼하여 슬하에 11(혜은, 성혁)을 두었다. 200579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영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홍성교회 묘지에 잠들어 있다.

 

 

 Ⅱ. 박화목 동화의 세계

 

박화목 문학의 연구는 동시에 편중되어 있고 동화에 대한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동시 연구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진 것은 없다. 이는 박화목 관련 학위 논문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동시는 상상과 동경과 애수의 세계6)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동화는 허무적 이상주의, 기독교적 이상주의7)로 대변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동문학의 사적 체계를 위해서도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꼼꼼히 읽고 그 특징을 파악하는 연구 및 논의가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박화목이 동시로 문단에 등단하여 60여 년간 이룬 작품 활동 가운데 특히 그의 동화 세계를 중심으로 주요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박화목의 동화 및 동화관을 탐색하여 우리 아동문학계의 작가작품 연구 및 아동문학사적 연구의 기반을 다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박화목 문학을 조명한 연구물로는 박덕은의 박화목 동시의 세계」(『한국아동문학작가작품론』, 서문당, 1991), 진선희의 박화목 동시 연구 1」(『한국아동문학연구』 192010), 「본향에 대한 그리움의 감각적 구체화-박화목 동시 연구 2」 (『한국초등교육』, 대구교육대학교, 2011), 지기원의 은종 박화목의 시에 나타난 기독교 세계관』(장로회신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9) 등이 있다. 본고는  『다리부러진 인형』(1994)

박화목 동화선집 부엉이와 할아버지』(1994)를 기본 텍스트로 삼고자 한다.

 

  「개똥벌레 삼형제는 풀숲에 사는 개똥벌레 3형제가 밤길을 가는 소년을 도와주는 내용이다. 박화목 동화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의인화 동화로 초가집이 있는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개똥벌레 3형제는 마을로 날아가서 사람들이 사는 방 안을 살핀다.

 

 초가집 지붕에 열린 박이랑, 뜰에 감나무랑, 창문에 비친 빨간 호롱불 빛이 모두 같았습니다.-중략- 어머니께서는 더욱 더 아파하십니다. 배를 움켜 쥐고 아파하십니다. 소년은 더 보고만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어머니, 제가 얼른 읍내에 가서 약을 사올게요?”하고 말합니다./“아니다, 괜찮다. 5리가 넘는 밤길을 네가 어떻게 갔다 오겠니.”/“무섭지 않아요.”

 

  소년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약을 사기 위해 2Km가 넘는 밤길을 간다. 이런 류의 효행담은 진부하지만, 어두운 밤길을 반딧불이들이 길을 밝혀준다는 점이 동화적이다. 개똥벌레 삼형제는 소년이 약을 지어 돌아오는 동안 어두운 길을 밝혀준다. 개똥벌레가 등장하는 의인화 동화인데 옛 이야기에 나오는 도덕적 미담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아마 소년은 개똥벌레 3형제 이야기를 어머니께 했을 거예요.”와 같은 에필로그는 사족일 수밖에 없다.  

  목마의 꿈은 일곱 살 준이가 주인공이다. 준이는 외삼촌이 생일 선물로 사준 목마를 타고 논다. 또래의 아이들이 몰려와서 준이를 부러워 한다. 준이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으쓱해한다. 한번만 타보자는 기수의 간절한 부탁을 준이는 거절한다. 기수가 방송국에 다니는 자기 아빠가 TV에 나왔다고 뻐기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기수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빈터로 가서 축구를 하고 논다. 준이는 혼자서 목마를 타니 재미도 없다. 한낮이 되니까 볕도 따갑다.

 

  준이는 목마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그 때였습니다. 준이의 눈길이 목마 얼굴에 쏠렸습니다./글쎄 이상도 하지요. 목마의 두 눈에서 눈물이 쭈르르 흐르고 있지 않겠어요?/살아 있는 말도 눈물을 홀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무로 깎아 만든 목마가 눈물을 홀리고 있는 것입니다.-중략-그러자 목마는 꼭 사람처럼,/“그래요, 울고 있어요.”/하고 대답을 합니다./“. 목마가 말을 할 줄 아는구나. 그래, 왜 우는 거니?”/“도련님이 그렇게 욕심쟁인 줄 몰랐어요.”/“내가 욕심쟁이라구?”/ “, 그래요. 혼자만 타겠다구 욕심을 부렸잖아요.”

 

  목마가 눈물을 흘리고 말까지 하는 일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 판타지의 세계라면 가능하지만 갑자기 펼쳐지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라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기우는 다음 이야기에서 해결이 된다. 시장에 다녀오던 준이 엄마가 목마를 탄 채 졸고 있는 준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준이가 잠깐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머! 우리 준이가 목마를 타고 졸고 있네. 쯧쯧!……” 그런데 이러한 꿈의 처리는 너무 식상하고 진부하다. “아마 준이는 내일 꼭 기수며 미나며 동네 아이들에게 목마를 태워 줄 거예요.”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이런 작법은 작가가 이야기속에 들어가 관여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독자가 스스로 깨닫게 해야지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서는 문학성이 훼손된다.

  「염소와 달밤은 점박이라는 염소가 주관자 시점으로 등장하는 동화이다. 이 동화에 등장하는 아저씨는 염소를 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런데 오른손이 없어 쇠갈구리 의수를 하고 있다. 그는 마른 풀을 먹기 싫어하는 염소에게 가끔 도화지를 먹이기도 한다. 화가 아저씨는 자신의 그림을 공모전에 출품하지만 고배를 마신다. 그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사회를 원망하기까지 한다. 화가 아저씨는 그림을 그려야할 도화지를 염소에게 먹이며 자신의 그림을 비하한다. 점박이는 귀한 도화지를 아깝지 않게 먹여 주는 아저씨가 더없이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아저씨는 읍내로 간 뒤 해가 진 뒤에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 때 읍내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동네 아이들이 염소들이 울고 있는 곳으로 온다. 염소 아저씨가 없는 것을 안 아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그 때, 여태 점잖게 있던 김인동이라는 아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목소리를 낮추어,

얘들아, 요즘 말야. 염소 아저씨가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더라.”-중략- “잘 몰라. 하여튼 접때 그린 염소 그림 있잖아?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출품했다던 거 말야. 근데 아직 보내지도 않았다는 거야.”/“왜 그랬을까? 그 그림은 특선도 될 수 있는 건데…….”/“접때 아저씨 말이, 자기는 미술학교에 안 다녔기 때문에 입선도 되기 어렵다는 거야. 보내 봐야 말짱 헛것이니까 안 보냈다는 거야…….”/하고 인동이는 사뭇 심각한 얼굴이었습니다./“그럴지도 몰라. 염소 아저씨 말이 맞을지도 몰라.”/옆의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었습니다./“요즘 세상은 말이야. 문학이구 미술이구 줄이 있어야, 입선도 되고 출세도 한다잖아?”

 

아이들의 입을 통해 사회에 팽배해진 비리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줄이 있어야 출세를 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대화는 왜곡된 사회 질서와 만연된 불공정과 부정을 풍자하고 있다. 미술학교에 안 다녔기 때문에 자신을 밀어줄 심사위원이 없어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는 화가 아저씨의 말은 동심을 멍들게 한다.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질타하는 내용은 독자들을 슬프게 한다. ‘문학이고 미술이구 줄이 있어야, 입선도 되고 출세도 한다는 주장은 부분이지 전체는 아니다. 순진무구해야 할 아이들의 입을 통해 일부의 비리를 사회 전체에 만연된 풍조인양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달이 떠오르자 점박이는 돌아오지 않는 아저씨가 걱정이 된다. 점박이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쓸쓸함을 느낄 때 달빛 속에서 목청이 째지는 듯한 노래 소리가 들린다.

 

술에 담뿍 취해 있는 듯 발걸음이 적이 비틀거렸습니다. 바른팔을 치켜들 때, 갈고리 손의 쇠붙이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중략-/ “하아! 이놈들, 여태 여기 있었구나. 나를 원망하면서 기다렸겠지. 미안 미안!”/아저씨는 우리들 염소의 고삐를 풀어 한 손에 쥐고, 또 다른 갈고리 손으로는 캔버스를 걷어 어깨에 메었습니다.-중략- “야아, 이 점박이야. 너는 내 맘을 알아주겠지? 난 그 속물들에게 내 그림을 보이기 싫단 말야! 특선? 그건 또 뭐 말라 빠진 거야? 차라리 내 소중한 그림을 외양간에다 걸어 놓겠다. 네놈들이 한겨울을 지낼 그 외양간에다 말이다. 암 그래야지, 너희들은 내 소중한 그림을 이해할 거야. 아 아, 내 귀여운 염소들아!”/아저씨는 고삐를 힘껏 당겼습니다. 목덜미가 조금은 아팠으나 그것은 즐거운 아픔이었습니다./나는 아저씨의 눈물이 함빡 고인 두 눈망울에 달빛이 비치어서, 마치 사파이어처럼 빛을 내고있는 것을 쳐다보았습니다.

 

염세주의자가 된 화가 아저씨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세상을 원망한다. 갈고리 손의 쇠붙이가 달빛에 반짝이는 장면은 세상을 향한 분노의 표현이며 저항이다. 이 동화에서 화가 아저씨가 왜 오른팔이 없어져 의수를 착용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의 헌법에는 표현,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공익성을 해치는 내용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들을 속물들로 규정하고, 자신의 소중한 그림을 외양간에 걸어놓겠다는 선언은 제도권에 대한 도전이고 저항이다. 심사위원 중에는 부패한 부류도 있을 수 있지만, 부분을 전체인양 매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불굴의 의지로 열심히 노력하여 뜻을 이르는 예술가들의 혼도 기억해야 한다. 힘든 고난과 역경을 천신만고 끝에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러야 더욱 영광스럽고 값진 것이다. 이 동화는 염세주의에 빠져 세상을 비난하는 화가의 행동을 미화하고 있다. 화가가 고삐를 당겼을 때의 목덜미의 아픔은 즐거운 아픔이고, 화가의 눈물을 사파이어처럼 빛을 낸다고 한 표현이 그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패한 사회에 대한 고발일 뿐 문학적 감동을 안겨주지는 못하고 있다. 좌절과 불행을 딛고 일어서는 반전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의 영혼을 물들이는 특수문학인 만큼 예술성에 반하지 않는 교훈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골목길의 눈사람은 눈이 오는 날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만든 눈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이다. 골목길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눈사람을 만드는 이야기와, 깊은 밤에 그 눈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큰축을 이룬다. 눈사람은 동화에 흔한 소재로 등장한다.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정감이 가고, 인형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영향도 있다. 또한 사람이긴 하지만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 없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눈이 온다, 눈이 온다!”/조무래기들이 좋아라고 골목길로 뛰어나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요./올 겨울 들어 모처럼 내리는 눈이랍니다. 그 동안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다가 오늘 저녁녘 드디어 눈이 내리는 것입니다./눈송이가 큼직큼직한 함박눈입니다. 금세 길바닥에 하얗게 깔렸습니다.

 

  눈이 내리면 특히 아이들이 좋아한다. 골목길의 아이들은 어서어서 눈이 많이 쌓이기를 기다린다.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서이다. 박화목 동화에는 조무래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어린아이를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6, 7, 준이와 같은 나이 또래의 조무래기들입니다.(목마의 꿈) ‘동네 조무래기들 몇 명이 이리로 오고 있었습니다.’(염소와 달밤) 이렇게 조무래기란 군더더기 말이 등장한다. 어린이를 위하는 글에 어린이를 하대하는 말을 쓰는 것은 잘못된 언어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골목길이 있는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낯선 아이 한 명이 눈덩이를 굴리자 아이들은 왜 남의 동네에 와서 눈덩이를 굴리냐고 캐묻는다. 낯선 아이는 이웃 아파트에 산다. 그는 아파트 단지에는 차가 많이 다녀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침내 골목에 사는 아이들이 눈사람 만드는 것을 허락하자 아파트 아이도 한쪽에 눈사람을 세워 놓는다.

  이 동화가 창작된 1990년 대에만 해도 아파트 단지에 제설제인 염화칼슘을 많이 살포하지 않았다. 요즘은 염화칼슘을 많이 뿌려 눈이 녹으며 쌓이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긍이 가는 삽화이다. 골목길 아이들은 아파트 아이에게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도록 한다. 저녁이 되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눈사람들만 남아 골목을 지킨다.

 

  한밤중이 되어 초록별들이 깜박이기 시작하자, 눈사람들은 말을 나눕니다. 눈사람들의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눈사람을 만든 아이들은 알아들을지도 모릅니다.

 “, 추위!”/하고 눈사람 하나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 때 마침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기 때문입니다./“눈사람이 춥다니, 무슨 말이야?”/ 다른 눈사람이 말대꾸를 합니다./“그래 그래. 우리는 말야, 눈사람이잖아? 눈사람이 춥다는 건 겁을 먹어서 그러는 거야.”/하고 또 다른 눈사람이 말했습니다./“우리가 이렇게 여럿이 있는데 말야, 겁을 먹어선 안 되는 거야.”/“겁을 먹어서 춥다는 게 아냐. 추우니까 추운 거지. 안 그래?”/“그래, 네 말이 맞아. 눈사람도 깊은 겨울 밤에는 추운 거라구.”/저 쪽에서 꼬마 눈사람이 말참견을 합니다.

 

  이렇게 눈사람들이 말을 하고, 핀잔을 주고,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없는 밤에 눈사람끼리 대화하는 장면은 굳이 개연성을 확보하지 않더라도 억지스럽지는 않다. 이는 동화적 분위기 때문이다. 분위기(atmosphere)란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상황이 주는 느낌을 말한다. 그것은 작품이 서정적이라든지 서구적이라든지 하는 톤(tone)과 달리 작품 전체의 흐름과 배경이 주는 인상을 말한다.8) 눈이 쌓여 있고 별이 반짝이는 밤의 분위기는 환상적이어서 판타지 세계로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골목에 있는 눈사람은 다양하다. 몸집이 작은 꼬마 눈사람도 있고, 커다란 눈사람도 있다. 골목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아파트 아이가 한쪽에서 만들어 외따로 떨어져 있는 눈사람도 있다. 아파트 아이가 만든 눈사람은 외톨이가 되어 외롭다. 다른 눈사람이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기동이가 만든 눈사람이 똑같이 눈사람이니 함께 어울려 놀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다른 눈사람들도 동의를 한다.

 

우리 눈사람은 얼굴과 손, . 몸뚱이만 있고 다리는 없는데, 어떻게 움직인다지?”/“합치고 싶어도 안 된다는 거 아니야?”/서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그 때였습니다./ 저만치서 또렷또렷한 말소리가 들려 왔습니다./“난 갈 수 있어. 난 너희들과 똑같은 눈사람이니까 말야. 너희들과 함께 있고 싶어. 그리로 갈 거야.”/이튿날 아침./아침 해가 밝게 떠올랐을 때, 밖으로 나온 골목길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만든 눈사람도 골목길에 사는 아이들의 눈사람과 함께 있으니까요.

 

  기동이가 만든 눈사람이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함께 이야기하며 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다리가 없는 눈사람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냐며 난감해 한다. 그러자 아파트 아이가 만든 눈사람이 난 갈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튿날 골목에 나온 아이들은 떨어져 있어야할 눈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밤사이에 눈사람이 스스로 움직였다는 것은 억지스러워서 핍진성이 떨어진다. 아무도 몰래 누가 눈사람을 옮겨 놓은 것으로 설정했어야 한다. 그 주체자가 아파트 아이이거나 기동이일 수도 있고, 밤늦게 귀가하던 술취한 아저씨가 되어도 좋다. 개연성이 없는 사건은 핍진성을 떨어드려 이야기의 동력을 떨어뜨린다.  

 

  「수나와 까치는 나래이터인 수나 엄마가 이끌어가는 1인칭 주관자 시점의 동화이다. 수나네는 몇 년전 변두리 동네로 이사오며 감나무 한그루를 사다 심었다. 그 감나무가 자라 감이 열리고 홍시가 된다. 수나는 엄마에게 까치밥으로 홍시를 남겨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날 밖에 나가 놀던 수나가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온다. 엄마가 이유를 물으니 둔덕 포플러나무(마루나무)에 있는 까치 둥지에 까치가 안 돌아와 빈 둥지라서 그런다는 것이다. 수나 엄마는 까치가 제 둥지를 잊지 않고 찾아올거라고 위로했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 까치 둥지에 까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수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까치가 왔나 보려고 둔덕에 달려가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순수한 동심이 있기에 가능하다.

  어느날 수나네 식구 귀에 집에 땅을 파헤치는 기계 소리가 들린다. 엄청나게 큰 땅차가 움직이며 흙을 퍼내는 소리이다. 까치가 오지 않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고층 아파트를 세우려고 땅을 파기 때문이다. 수나 아빠는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고 하지만 수나가 적극 반대를 한다. 감나무에 열리는 감을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수나 엄마도 어린 아이를 기르는 데는 뜰이 있어야 한다며 수나 의견에 동조한다. 요즈음 세태와는 동떨어진 견해지만,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를 수 있으므로 억지스럽지는 않다.

 

  아파트 공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큰 차들이 나타나서는 땅을 파고 흙을 퍼내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요란한 기계 소리가 우리 동네에까지 들려 왔습니다./우리 사람들 귀에도 시끄럽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까치 같은 날짐승은 그 소리에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였습니다./“엄마 엄마, 까치가요. 저 소리가 싫어서 안 돌아오나 봐요.”/하고 수나가 다시 말하였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구나.”/“까치가 안 돌아오면 어떡해, 엄마.”/“까치가 돌아와야 하는데…….”/나는 담장 너머로 저만치 멀리 흙먼지 피어 오르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온 나라가 아파트 공사로 몸살을 앓는다. 고령화 사회로 독거노인층이 많아지고, 비혼주의자가 늘어나 1인 가구가 증가하다 보니 주거 공간이 부족해지고 있다. 주택이 부족하니 건설은 해야하겠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 동화는 기계문명과 생태환경의 대립구조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동화가 쓰여졌던 1990년대에는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는 민간신앙으로 까치가 길조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시끄럽게 우짖는다는 이유로 공해로 전락되기도 한다. 또한 농작물을 해친다는 이유로 해조로 배척받게 된 것도 현실이다. 시대 상황에 따라 진리도 변하는 것이다. 시대 상황은 바뀌어도 동심은 변하지 않는다. 까치밥을 보며 까치를 기다리는 동심이 있기에 세상은 정화되는 것이다.

  「부엉이와 할아버지는 아기부엉이와 빈 집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병든 할아버지와의 애틋한 정을 담은 동화이다. 어느날 밤 엄마부엉이가 배고파하는 아기부엉이에게 줄 먹이를 구하러 간다. 혼자 남아 있는 아기부엉이는 심심하다. 아기부엉이는 조금만 놀다 올 생각으로 숲 속을 벗어나서, 산고개로 날아간다. 산고개를 넘어서자 저만치 멀리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깜박이는 호롱불이 보인다. 아기부엉이는 동네 가까이 까지 날아가고 싶지만, 힘이 부쳐 둥지가 있는 숲으로 돌아온다.

  여름이 되자 아기부엉이도 부쩍 자라게 된다. 아기부엉이는 불빛이 비치는 마을을 구경하고 싶어한다. 엄마에게 허락을 겨우 받은 아기부엉이는 마을을 찾아가지만 온 동네가 캄캄하다.

 

집집마다 방 안이 깜깜하였습니다./'이상한 일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하고 아기부엉이는 동네 가까이 날아가지 않고, 그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엄마부엉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엄마부엉이는,/"나쁜 사람들이 몰려온 모양이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엄마는 무슨 일이건 죄다 알고 있는 듯 싶었습니다./"엄마 엄마, 사람들 중에는 나쁜 사람이 있어요?"/"그럼 있고말고, 나쁜 사람은 우리 부엉이들을 총으로 쏘아 죽인단다."/"사람들이 우릴 죽여요?"/"아니야. 어떤 사람은 부엉이를 무척 사랑하지. 어느 마을엔 새하구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도 있단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 부엉이를 무척 사랑해 주신단다."/"그처럼 마음 좋은 할아버지를 만나 보았으면……."/아기부엉이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의인화동화에서 동물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도록 설정하는 것은 판타지 세계로 가는 통로 구축이나 만큼 중요하다. 작가는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열쇠로 새 하고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를 꺼내 들었다. 그 할아버지는 부엉이를 무척 사랑하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이다. 어느 날 밤 아기부엉이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외딴집 하나를 찾아낸다. 아기부엉이는 호롱불을 밝힌 그 초가집으로 날아간다. 아기부엉이가 그 집 뒤뜰에 있는 나무가지에 앉아 울자 창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나타난다. 할아버지는 부엉이를 부르는 듯 손을 젓는다. 아기부엉이는 할아버지가 손짓하는 대로 창 가까이 날아간다. 몸이 무척 여윈 할아버지는 창 가까이 잠자리를 펴고 누워 있다.

 

아기부엉이는,/"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말을 건넸습니다./"오냐. 왜 그러니?"/할아버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부엉이의 말소리를 알아듣는 듯싶었습니다./"할아버지, 이 마을엔 왜 집집마다 등불을 안 켜고 있어요?"/", 그건…… 그건 말이다. 동네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어머, 어째서 동네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지요?"/"모두 피난을 갔어. 전쟁이 일어나서 나쁜 사람들이 몰려올 거라며 모두 이 마을을 떠난 거야."/"그럼 할아버지는 왜 안 떠났어요?"/"이렇게 앓고 있으니 몸을 움직일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나 혼자 이 마을에 남아 있는 거란다."/"어쩜! 불쌍한 할아버지!"/하고 아기부엉이는 중얼거렸습니다.

 

  아기부엉이가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혼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삽화이다. 밑줄친 것처럼 대화문의 끝을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하고 아기부엉이는처럼 자주 설명하고 있다. 이는 주로 시를 창작한 시인이 동화를 쓸 때 나타나는 습관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군말의 사용은 깔끔한 문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부엉이와 할아버지가 대화하는 장면이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사전에 깔아 둔 포석 때문이다. 밑줄친 알아듣는 듯싶었습니다.’처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거나 어느 마을엔 새하구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도 있단다.’라고 개연성을 살리기 위한 사전 작업 때문이다. 이는 의인화동화나 판타지 동화를 쓸 때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핍진성의 강화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어디 갔을까?'/하지만 병을 앓아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이 밤중에 어디 갔을 리가 없습니다./"아기부엉이는 창문 가에 내려와서 주둥이로 창문을 열었습니다. 마침 떠오른 하얀 달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췄습니다. 그 달빛 속에 할아버지의 흰 수염과 흰 얼굴이 어슴푸레 떠올랐습니다./"할아버지?"/하고 아기부엉이가 불렀으나 할아버지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입가에 고요한 웃음만이 남아 있었습니다./석류나무 가지에서 마지막 잎이 하느작거리며 떨어졌습니다. 달은 더 솟아올라 환하게 비치고 그 달빛 속에 할아버지의 얼굴도 달같이 떠올랐습니다.

 

  이 동화는 부엉이가 등장하는 부분적 의인화동화이다. 아기부엉이가 창문가로 내려와서 주둥이로 창문을 여는 삽화는 자연스러워 핍진성을 확보하고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 할아버지는 스스로 창문을 열었지만, 위 인용문에서는 할아버지는 병석에 누워있기 때문에 창문을 열 수가 없다. 할아버지의 병이 더 깊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하얀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그 달빛 속에 흰수염의 할아버지가 혼자 누워있는 장면은 쓸쓸하기도 하지만 몽환스럽다. 그런데 병을 앓아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입가에 고요한 웃음만이 남아 있었다는 표현은 부자연스럽다. 병들어 혼자 남아 있는 아픈 할아버지가 고요한 웃음을 띌 일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개연성은 가독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가엾은 할아버지!'/아기부엉이의 큰 두 눈에 눈물이 함빡 괴었습니다./그리고 이제는 정말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데 혼자서, 부엉 부엉 부엉…… 자꾸 울었습니다./그 밤이 지새도록 울었습니다./날이 환하게 밝아 와도 아기부엉이는 할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산너머 숲 속의 보금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도 또 다른 부엉이들도 모두 잊고 있었습니다. 또 부엉이를 물어간다는 큰 들짐승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아기부엉이는 언제까지든 할아버지 옆에 있고 싶었습니다./쌀쌀한 초겨울 바람이 불어와서 들에 쌓인 가랑잎들을 날렸습니다./그리고 아기부엉이도 할아버지 옆에서 죽었습니다.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아기 부엉이는 외롭고 불쌍한 할아버지 곁을 밤새 지킨다. 산너머 숲속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도 가지 않고, 큰 짐승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병든 할아버지를 지키며 사랑을 듬뿍 쏟는다, 그런데 마지막은 할아버지도 아기부엉이도 함께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 동화는 6.25 전쟁을 시공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두 피난을 떠나고 텅빈 마을, 거동을 못하여 혼자 남아 마을을 지키는 병든 할아버지는 전쟁이 빚어낸 비극적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 동화는 애상적이어서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동정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동화의 일반적 경향인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적 결말을 표방하고 있다.

꽃별이 된 떡갈나무는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난쟁이 떡갈나무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척박한 바위 틈에서 살아가는 떡갈나무는 성장이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먼발치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그 소리는 여태 들어 본 적이 없는 언짢은 소리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친구도 없다. 어느날 떡갈나무에게 다람쥐 부부가 찾아온다. 외롭게 지내던 떡갈나무는 다람쥐 부부와 친구가 되니 즐겁고 행복하다. 떡갈나무는 도토리를 많이 열어 양식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다람쥐 부부는 근처에 보금자리를 틀기로 하고 자신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이사온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럼 너희들도 그 괴상한 소리를 듣고 겁이 나서 도망을 친 것이구나. 대체 어떤 짐승이 그런 소리를 내는 거냐?”/“떡갈나무 아저씨, 그건 짐승이 아니에요. 사람이 부리는 기계라구요. 들짐승보다 더 엄청나게 큰 쇠뭉치예요.”/“그래, 그 기계라는 것이 너희들을 잡아먹으려 들더냐?”/“떡갈나무 아저씬 뭘 모르네. 사람들이 그 기계를 부려서 산을 온통 허물어뜨리고 있는 거예요. 떡갈나무 숲도 다 없어지구요. 그러니까 저희 보금자리도 다 파헤쳐져 없어졌단 말예요.”/다람쥐들은 그때 일이 떠올려지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떡갈나무도 끔찍스런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중략- 산을 흔들어 대는 굉장한 소리가 들렸을 때는 그 고약한 냄새가 온 산에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떡갈나무는 그것이 화약 냄새인 것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영리한 다람쥐들도 몰랐습니다.

 

다람쥐들이 말한 괴상한 소리의 정체는 포크레인이다.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기계로 떡갈나무 숲을 파헤치는 것이다. 다람쥐 부부가 새로 꾸민 보금자리에서 아기다람쥐들이 태어난다. 떡갈나무는 다람쥐 식구들을 위해 더 많은 도토리를 키운다. 그 동안에도 쿵쿵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리는데, 어떤 때는 뽀얀 먼지 바람까지 불어온다. 그 먼지 바람 속에 고약한 냄새가 풍겨 오기도 했는데 바위를 발파할 때 나는 화약냄새인 것이다. 돌산을 파헤치느라 화약을 이용하여 폭파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취미와 여가를 위해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는 반생태적인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비가 오고 나면 고약한 냄새는 말끔히 가신다. 그래서 떡갈나무는 비가 내리기를 기다린다. 어느날 몹시 세찬 비가 내린다. 하지만 다람쥐네 식구들도 보금자리 깊숙이 들어앉아 있으니까 안심이 된다. 하지만 장대비가 계속 내리자 떡갈나무가 서 있는 땅속이 진동하는 수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산마루 쪽에서 흙물과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한다. 떡갈나무는 다람쥐네 보금자리가 땅속 깊이 묻혀 버릴까봐 걱정이다. 사람들이 골프장을 만든다고 산을 파헤쳐 놓아 산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마침내 떡갈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지고 만다. 날이 밝고 몇 시간이 지나자 비가 그치고 먹구름도 걷힌다.

 

그제야 다람쥐네 식구는 땅 밖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보았습니다. 다행히 땅구멍이 막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떡갈나무가 쓰러져 떠내려오는 흙더미를 막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떡갈나무 아저씨가 우릴 보호해 줬어.”/간밤에 일어난 일을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떡갈나무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저씬 쓰러져서 어떡해요?”/어미다람쥐가 말했습니다./하지만 떡갈나무는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어디선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이 작품 역시 떡갈나무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키작은 떡갈나무는 친구도 없이 외롭게 지냈기 때문에 이웃이 되어준 다람쥐를 고마워한다. 큰비로 산사태가 났을 때에도 다람쥐 가족이 사는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떡갈나무이다. 그런 떡갈나무는 산사태로 쓰러져 희생양이 된다.

 작가는 인간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세태를 고발하기 위해 떡갈나무를 희생시키는 극약처방을 쓴 것이다. 오늘날에도 장마철이나 태풍이 불 때마다 산이 무너지고 마을이 매몰되는 뉴스를 목도하게 된다. 우이독경 식으로 무분별하게 펼치는 난개발로 인해 산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화의 결말은 꽃별이 된 떡갈나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날이 개이고 떡갈나무는 쓰러져 죽는 것으로 막을 내릴 뿐 꽃별과는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심술쟁이 다람쥐는 떡갈나무 우거진 가을숲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떡갈나무 숲에 다람쥐마을이 있다. 다람이와 토실이는 부부 사이로 이 마을에서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아간다. 다람쥐마을에 걱정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음씨 나쁜 다람쥐 한 마리가 심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심술쟁이 다람쥐는 혼자 살며 남의 먹이를 빼앗기도 하고 훔치기도 한다.

  다람쥐들은 덩치도 크고 종류도 다른 그 심술다람쥐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어느날 두더지로부터 심술쟁이 다람쥐가 버섯을 뜯어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람이 부부는 독버섯을 먹으면 목숨이 잃을 수 있다고 걱정한다.

 

그 버섯을 많이 먹으면 목숨을 잃는 수도 있대요.”/토실이가 말을 이었습니다.

두더지는 그 말을 듣고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껌벅이었습니다./“잘 됐잖아? 그 녀석이 독버섯을 실컷 먹고 죽으면 말야. 골칫거리가 없어지는 거 아냐?”/“그래도 그렇지가 않아, 심술쟁이 다람쥐라도 독버섯을 먹고 죽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독버섯을 못 먹게 해야지, 목숨을 빼앗기는 걸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그 나쁜 짓만 골라 하는 녀석을 살려 주자는 거니?”/“살려야 하고말고! 어서 우리 버섯밭으로 가보자. 그 동안 벌써 많이 먹었으면 큰일인데…….”

 

  심술쟁이 다람쥐는 반동인물이다. 반동인물인 심술쟁이 다람쥐가 독버섯을 먹고 죽게 된다면 잘된 일이라고 손뼉을 치는 것이 대다수 성인들의 정상적인 사고이다. 반동인물이 얄미운 짓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강도는 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심술쟁이다람쥐를 걱정하며 살리기 위해 버섯밭으로 가려는 다람이 부부의 행동은 동심지향적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도 오류가 보인다. 두더지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껌벅이는 대목이다. ‘껌벅이다는 자꾸 느리게 감았다 떴다가 하다는 뜻이다. 햇빛이 없는 땅속 생활을 하는 두더지는 눈이 아주 작거나 퇴화되어 없다. 그러므로 눈을 껌벅이다는 표현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 특히 생태동화를 쓸 때 작고 사소한 표현에도 사실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 다람쥐는 버섯밭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독버섯을 욕심을 부려 많이 따 먹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다람이네 둘은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그 다람쥐는 누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알았는지, 달려들 듯이 발을 휘저었습니다. 하지만 그 발의 움직임은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허공을 향해 휘적거릴 뿐이었습니다.-중략-/그토록 못살게 굴던 심술쟁이 다람쥐였지만 죽어 있는 모양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다람쥐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욕심을 부리는 건 안 좋은 일이야. 더구나 심술을 부리며 남을 해치는 건 결국 자신을 해치는 거와 마찬가지라구……."/다람이가 중얼거렸습니다./그러자 토실이도 그 말을 받아./"그럼요, 제 분수껏 먹이를 모아 살아가야 한다구요."/하고 말했습니다.

이런 슬픈 일이 생긴 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가을 하늘은 마냥 푸르기만 했습니다.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욕심을 부리고 심술을 부리며 남을 괴롭히던 다람쥐는 결국 독버섯을 먹고 죽는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낳은 동화이기에 다람쥐가 버섯을 먹을 수 있게 설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생태적으로 다람쥐가 좋아하는 먹이는 도토리와 밤 같은 견과류이고, 작은 새알이나 곤충도 먹는다. 그런데 다람쥐가 독버섯을 먹고 죽었다는 설정은 비약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사는 동물 중에서 식중독에 걸려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존재는 탐욕의 대명사인 인간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못살게 굴던 심술쟁이 다람쥐가 죽어있는 모습을 본 다람이네는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그를 보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안 좋은 일, ‘제 분수껏 먹이를 모아 살아가야 한다고 한 다람이와 토실이의 말은 교훈성이 노정되어 문학성을 폄하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주제는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어야지 겉으로 드러나서는 도덕 교과서가 될 수밖에 없다.

  「빨간 창문은 전설에나 나오는 인어가 등장하는 동화이다. 사철 바닷물결이 철썩이고, 흰 모래톱이 펼쳐지고 해당화가 핀 바닷가가 배경이다. 바다가 보이고 소나무가 서있는 언덕 위에 빨간 창문의 집이 있다. 이 집에는 열두살 쯤 되는 순이와 어머니가 단둘이 살고 있다. 순이가 이 집에 살게 된 까닭은 병약해서이다. 순이 어머니는 순이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는데,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도 들려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열두살이라는 순이의 눈높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이다.

  순이는 어머니에게 인어가 바닷속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 순이가 어느날 밤에 인어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다. 순이 어머니는 꿈을 꾼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인어는 상반신은 사람의 몸을 가졌으나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대부분이 여성인데 준수한 외모로 묘사되지만, 이 동화에 나오는 인어는 못생긴 얼굴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인어는 순이의 꿈속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인어는 별들의 그림자가 수없이 비치는 바다 한 가운데 조용히 떠 있었습니다./ 먼 바다 깊은 곳에 인어는 살고 있었습니다./그리고 밤이 깊어지면 인어는 바다 위로 떠올랐습니다.-중략-

엄마, 이런 달 밝은 밤에는 인어도 달 구경을 나올까요?/소녀가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 말소리가 인어의 귀에 똑똑히 들렸습니다./”그럼요, 아가씨. 인어도 달을 많이 좋아한답니다.”/인어는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창문이 열려, 달빛 아래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 동화에서 인어는 먼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다. 밤이 깊어지면 바다 위로 떠올라 육지로 향한다. 그런데 이 동화에 등장하는 인어는 비늘을 가진 몸뚱어리에다, 허리 위로부터 사람의 모습을 닮긴 했어도 사람은 아니고, 두 눈이며 코가 사람의 그것과 조금은 비슷하긴 했어도 무척 미운 얼굴로 묘사되고 있다. 이 못생긴 인어는 비늘이 덮인 꼬리를 철썩이며 말을 한다. 인어는 사람을 보고 싶어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소녀의 집 창문을 바라보며 창문이 열리기를 고대한다. 마침내 창문이 열리고 달빛 아래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자 무척 기뻐한다. 그런데 보편적인 인어와 달리 못생긴 인어로 묘사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이러한 추한 인어의 등장은 동화의 환상성을 떨어뜨린다. 꿈과 희망을 주는 문학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못생긴 인어를 등장시킬 당위성은 없다.

 

엄마 엄마, 어젯밤 꿈에 인어를 봤어요. 인어가 바다기슭 이 쪽으로 헤엄쳐 와서 꼼짝 않고 있었어요. 먼 바다 깊은 속에요. 정말 인어가 살고 있나 봐요.”/혼자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순이 어머니가 창문을 여니까, 잔잔한 바다가 순이의 두 눈에 가득 들어왔습니다./철썩 철썩 철썩.../바위에 부딪치는 물결 소리도 들려 왔습니다./하지만 지난 밤에 생겼던 일을 순이도 순이 어머니도, 또 아무도 몰랐습니다.

 

빨간 창문 너머로 소녀의 얼굴을 본 인어는 창문이 닫히자 다시 열리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소녀를 절실히 보고싶어하는 간절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검은 구름이 몰려와 달빛을 가리고 날씨가 거칠어져도 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고 꼼짝 않고 있는 인어이다. 인어가 소녀를 보고 싶어하는 당위성이 확보되지 않아 감동이 다가오지 않는다. 인용문은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병약한 소녀는 꿈속에서 인어를 만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꿈 이야기는 판타지의 동력을 떨어뜨린다. 소녀가 인어를 만나 대화를 하고, 그 대화를 통해 꿈과 희망을 갖도록 설정했다면 이야기의 감동은 달라졌을 것이다.

  「얼굴바위의 슬픈 이야기는 훼손되고 오염되는 해양 생태 문제를 고발하는 동화이다. 사람의 얼굴을 닮은 바위가 주인공으로 작가 관찰자 시점의 동화이다. 얼굴바위가 있는 곳은 남쪽, 아름다운 어느 섬의 바닷가이다. 그 곳은 호젓한 곳이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고, 이따끔 낚시꾼들이 찾을 뿐이다. 어느날 새벽녘 꽃게가 얼굴바위 밑에서 소란을 피운다. 꽃게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좋은 일이지 뭐니.”

바위 아저씨, 아저씨에겐 별일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꽃게 식구들은 싫어요.”/ “싫다니 왜 그러지?”/“싫다니? 왜 그러지?”/“사람들이 말예요. 바닷물을 온통 흐려 놓는다구요.”/“바닷물을 흐려 놓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알 수가 없구나.”/얼굴바위는 꽃게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꽃게는 갈수록 더러운 것들이 떠내려와 바닷물이 오염될 것이므로 더 외딴 곳으로 이사를 가려는 것이라고 한다. 바위는 초록별에게 바다가 온통 더러워진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물어보려 한다. 어느날 밤 검은 물건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면서 별빛을 삼킨다. 그 기분 나쁜 물건들 사이에 초록별 하나가 깝박이고 있다. 그 초록별은 빛이 흐려지고, 눈물이 고여 있다. 초록별을 의인화한 대목이다.

 

초록별아, 왜 눈물이 고였니? 누가 너를 슬프게 하는 거니?”/“바위 아저씨, 저 쓰레기들 때문이에요.”/“무어? 저 괴물 같은 것들 말이냐?”/“, 저건 사람들이 마구 버린 쓰레기라는 것이예요. 저것들 때문에 저도 이 곳에 올 수 없었다구요. 아저씨, 저것들을 이 바다에서 쫓아내 주세요!”/초록별은 하소연하듯 슬프게 말했습니다.

 

  초록별과 얼굴바위의 대화는 환경오염의 폐해와 그 심각성을 명징하게 고발한 말이다. 유원지는 물론이지만 특히 바닷가는 밀려든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 사람들이 함부로 버린 비닐, 프라스틱류, 나무조각, 1회용품, 음식찌꺼기, 각종 폐기물 등이 바닷물을 오염시키고, 해양 생물들까지 병들게 한다. 울고 있는 초록별은 바다의 오염에 희생되는 여러 생물들을 대변한다. 사람들이 함부로 버린 비닐봉지를 먹은 바다거북이 폐사하고, 각종 기형물고기들의 모습이 언론에 등장하기도 한다. 바다 환경이 오염되면 사람도 피해를 입게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꽃게와 초록별의 목소리를 통해 호소하고 있다.

 

 Ⅲ. 나오는 말

  박화목은 시인과 동시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출간한 작품집을 보면 오히려 창작동화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화를 다룬 논문이나 평론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보리밭과수원길로 알려진 박화목의 표상이 시인이나 동시인이라는 고정 관념에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첫동시집 호롱불』(1957)을 내기 전에 소년소설집 밤을 걸어가는 아이』(1954)와 동화집 부엉이와 할아버지』(1955)를 먼저 출간했다. 이후 1962년에  『박화목 아동문학 독본』(을유문화사)을 발간한다. 이 책에는 소년소설 첫눈 내리는 밤을 포함한 5, 동화 키다리 사나이와 아이들을 비롯한 10, 동시 꽃이파리가 된 나비를 비롯한 40, 동극 포도원」 1, 평론, 수필 아동문학의 문학적 위치5편이 실려 있다.

  박화목 문학의 키워드는 소녀, , 아이, 인형, 눈물, , 무지개 등 작고 여리고 여성 편향적인 낱말들이다. 표제어에 소녀가 들어간 동화책만 보아도 꽃팔이 소녀의 그림』, 『눈 소녀』, 『램프 속의 소녀』, 『아파트 소녀와 나비4권이다. 6권의 동시집 중에서도 나비, , 꽃 등이 키워드로 등장한다.

  그가 펴낸 동시집은 6권인데 비하여 동화·아동소설집은 20권으로 세 배 이상 많다. 따라서 박화목 문학을 논할 때 동시만으로 국한한다면 편린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동화와 소년소설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 1) 그가 필명을 은종이라고 한 것도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실버벨(Silver Bells)”이란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삶을 살고 싶어서라고 했다
  • 2) 주일학교 교사였던 이헌구에게 동시 2편을 보여주자, <아이생활>에 투고하여 겨울밤이 게재되었고, 그 다음 해에 피라미드가 추천되었다.
  • 3) 함처식(咸處植, 1910 ~1980) 평양 출생. 호는 영천(靈泉). 평양 광성고보 수료. 1932아이생활〉 〈기독신보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 대표작에 벼개애기」, 「혼자만 아는 그림」, 「성난 손자국」, 「말하는 벙어리등이 있고, 「탄일종의 작사가이다
  • 4) 솔밭 길 산비탈 길/사십 리 길은/초생달 기울어진/으스름 밤길.//내 나라 내 땅 안에 /내 길 걷는데/무엇이 무서워서/밤을 새워 걷나요.//서러운 국경./들에 참새들도/하늘의 아기별도/잠들었는데 //산 고갤 살금살금/기어 넘고요./풀숲 새 몰래몰래 /걸었습니다. -「38도선전문
  • 5) 죽순1946년 창간되어 해방 공간 4년 동안 12집이 발간되었으며, 1979년 봄 복간호를 낸 이후에도 현재까지 계속 발행하고 있는 대구 지역의 시 동인지이다. 『죽순은 중앙과 대타적인 지점에서 지역 문학의 성과를 보여주었으며, 해방기 대구지역의 시문학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수용해 나간 매체였다. 『죽순은 이윤수, 이호우, 박목월 등 대구지역 시인들 외에 유치환, 김춘수, 조지훈, 박두진, 설창수, 조향 등 타지역의 유명 시인들도 참가시켜 필진의 위상을 높였다.
  • 6) 이재철(1978), 『한국현대아동문학사』, 일지사, p. 415-417.
  • 7) 이재철(1989), 『세계아동문학사전』, 계몽사, p. 131.
  • 8) 박상재 동화창작의 이론과 실제』 (2002, 집문당) 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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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계간 시작 박형준 체험만남풍경마음마을사 2024
나희덕 [문학평론]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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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탄생하는 예술가와 그의 붉은 몸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계간 현대비평 강지희 AI예술비가역적 시간붉은 몸성해나혼모노김지연하와이사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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