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지진(地震)
지진(地震) 강경보 차(茶)받침 위 찻잔이 다르륵 떤다 장롱이 딱 소리를 내며 제 숨 한번 분질러 보듯 고요가 어둠에 겨워 몸서리치는 것일까 그런데 그게 아니다 유리창이 흔들리고 추억을 더듬던 나무의자가 먼 별의 울림을 내 등에 던진다 깊은 밤 책을 읽다가 아뜩해진 나는 미궁의 백지 위를 질러가는 벌레가 된다 가족들 세상 모르고 잠든 건넌방별을 보며 마음으로 울고 울어 세상에 흘려보낸 강물이 족히 은하를 이루리라 온 몸으로 갉아먹은 나뭇잎도 이미 지나온 사막처럼 흩어져, 어느덧 나는 휘갈겨 쓴 문자처럼 흔들리고 난 뒤에야 겨우 모래바람 덮인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가끔 이렇게 세상이 먼저 뒤집어지는 날은 참 아득도 해라! 마음마저 뒤집으며 집 찾아가는 벌레의 길에서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아스팔트 밥論
아스팔트 밥論 강경보 밥들아!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오늘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라고 혜화동 하나은행 앞 구두수선집 철판에 누군가 쓰셨네 내 오로지 거룩한 밥 공양을 위하여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오늘 문득 세상의 밥이 되어 걸어가네 나를 밥이라고 생각하는 그대여 따뜻하게 나를 잡수시고 국도 말아 드시는 그대여 살아야 할 의무처럼 누군가 자꾸 내 앞에서 스러지고 술 불콰한 가슴으로 귀가하는 저녁 내가 밥이라고 불렀던 사랑이 늙어가고 내가 사랑이라 불렀던 밥들이 고양이눈을 하고 일어서는 저, 저것들 온몸으로 보시하는 족속들 어느새 집을 뛰쳐나와 음산한 아스팔트 위에 납작 깔려 있었네 순간의 비명이 착색되어 있는 거리 아스팔트도 차곡차곡 기억을 먹네 고양이 개 같은 것들의 기억을 먹는 거리를 걷다가 먹이사슬처럼 구두수선집 철판 앞에 다시 서네, 누군가 ‘반드시’라고 쓰셨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서정시인의 윤리학, 타자에게로 가는
서정시인의 윤리학, 타자에게로 가는 - 강경보, 『우주물고기』(종려나무, 2010) 박연옥 1 강경보의 첫 시집『우주물고기』에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파를 보내는 이동통신기지국이 있다. “사랑해라 사랑이 아니라면/내 여기까지 못왔다는”(「첫눈」) 어머니의 말씀은 ‘눈’으로 내려오고, “말이 샘물처럼 고여서 이제는 아예/제 몸이 말이라고 그냥 그런 줄 알라고”(「우포늪통신」) 왕버들 뿌리는 마음의 생각들을 물젖은 전파로 쏜다. 그런가 하면 “꿀벌이나 나비가 찾지 못할 아주 작은 가시꽃을 달고”(「가시여뀌 사랑법」) 있는 가시여뀌는 열매에 “공갈 꽃화장”을 분칠하고 구애(求愛)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 통신회사는 운영방침도 독특해서 “끝없이 마음을 닳게 하여 한 사람에게로 가는 길이 폐허의 신전이 다 될 때까지”(「구두가 걸어간 방향에 대하여」) 고객의 마음을 원형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제일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