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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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체셔 고양이의 미소와 예술의 사라짐
사유의 드로잉_제4회 체셔 고양이의 미소와 예술의 사라짐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1. 위장이 내는 소리 그녀는 지금 늦은 저녁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1시간 정도 음악이든 뉴스든 휴대폰을 통해 뭔가 들으며 아파트 뒤편 산책길을 걷다 오는 정도다. 하지만 막상 걷기를 끝내고 집에 올 때쯤에는 배가 고파지기도 한다. 9층 자신의 집에 가기 위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금도 그녀는 살짝 시장기를 느끼며 이어폰을 타고 들리는 영어 문장에 귀 기울이고 있다. 물론 자기 뒤에 서 있는 낯선 남자와 엘리베이터에 단둘뿐이라는 사실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경계할 분위기도 아니어서 그냥 멍하게 귓속으로 스며듣는 그 기계적 재생 음을 듣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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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일본식 정원과 글쓰기의 미
사유의 드로잉_제3회 일본식 정원과 글쓰기의 미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내가 교토에 가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혹은 도시 전체가 일본 전통문화의 정수로 정교하게 꾸려진 그 유서 깊고 아름다운 곳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길가 하수도를 덮고 있는 대나무 덮개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참 아름다웠다고. 직사각형 하수도 구멍에 딱 맞는 길이로 잘린 중간 두께의 대나무들이 군더더기 없이 일렬로 반듯하게 묶여 있는 그 덮개에서 나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취향을 보았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 문화를 표상하는 하나의 기표처럼, 여름 끝자락 어느 날 대낮의 햇볕 아래를 걷고 있는 이방인 여행자에게 다가왔다. 물론 그것은 하찮은 하수도 덮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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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무지갯빛 즐김과 차이의 소송
사유의 드로잉_제2회 무지갯빛 즐김과 차이의 소송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1977년 6월의 첫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리세오 극장에서 단테의 『신곡』을 테마로 강연을 한다.(이하 관련 인용문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 송병선 역, 『칠일 밤 Siete Noches』, 현대문학, 2004년 판본이다.) 20세기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인이자 문학자,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원류이자 그 이론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그가 중세의 고전으로 ‘문학의 밤’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르헤스는 여느 촌스러운 문학인마냥 『신곡』에 대한 성서적 독해나 작가의 자의식을 추적하는 독서법을 강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