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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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오! 라일락
라일락 고선경 아무도 나랑 놀아 주지 않았을 때 언니도 묘연했다 우리는 같은 중학교 학생이었고 엄마 아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급식을 누구와 먹는지 배드민턴을 누구와 치는지 같은 반 아이들이 어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지 언니는 왜 나를 보러 오지 않는지 언니는 나보다 한 살 위고 이효리처럼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췄다 언니의 친구들은 나를 몰랐지만 나는 알았지; 마리 제니 소이 그런 이름을 가진 언니들 나도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운 발음의 이름이고 싶었는데 언니는 딱 한 번 나와 급식을 먹어 주었다 내가 배식 당번이 되었을 때 언니의 식판에는 요구르트 두 개가 놓였다 언니와 같은 고등학교에 지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하면 어디까지 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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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밝은 산책
밝은 산책 고선경 감은 눈 속에서 어두운 숲이 부풀었어 이파리 한 장에도 나는 쉽게 긁혔고 너는 괜찮아 괜찮아 말해 주었다 동전을 던져 미래를 결정하려 했으나 동전은 손바닥을 통과해 깊고 깊은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았다 미래가 나를 결정하려 하는 것 같아 괜찮아 괜찮아 하지 말고 네 심장을 꺼내 나에게 줘 너의 그 녹슨 심장 말이야 혹시 억울하니 밤은 매일의 페이지를 넘긴다 파본 파본 파본 나는 너무 시끄러운 귓속말이야 마음대로 길을 내지 마음에 드는 식물을 보면 뿌리째 뽑아버리지 어디선가 날아온 공이 뒤통수를 세게 쳐서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어 눈을 뜨면 어떤 세계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식당에서 집에서 캄캄한 눈꺼풀 안쪽을 두드렸다 한 달도 가고 일 년도 갔다 한물간 동전들이 하나둘 내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시 그 숲에 가게 된다면 불을 질러버릴 거야 그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때 숲은 환희로 가득 차게 되리라는 게 내가 지은 결말이었다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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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여름 오후의 슬러시」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여름 오후의 슬러시 고선경 투명한 봉지 속에서 금붕어가 헤엄친다 너와 보도블록을 따라 걸을 때 슬리퍼가 너무 작다 슬러시에 꽂힌 빨대 하나로 너와 감기를 나눠 마시는 생각 왜 이렇게 기우뚱하게 걸어 금붕어도 멀미를 느낄까 나는 계단도 침착하게 굴러 달고 끈적이는 슬러시를 엎지르면서 가끔 얼음 알갱이가 씹힌다 아 시원해 교실 문을 열자마자 마루에 눕고 싶고 우리의 체육복은 지저분하다 땀과 흙이 점점 번지면서 체육대회를 지속하려 한다 열기를 견디는 것까지가 경기이듯이 여기를 견디는 것까지가 규칙이다 슬러시에서는 열대 과일 맛이 났다 맛이라기보다는 향에 가까운 우리는 기후를 베끼려 했다 몸에 판박이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였고 잘 안 지워졌다 슬리퍼 한 짝이 음수대 위를 출렁거렸다 봉지만 벗어나면 익사하는 금붕어 금붕어는 죽다 말다 하면서 슬리퍼를 통과했다 증상인지 사랑인지 구분되지 않는 나의 멀미 오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