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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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바다의 힘
바다의 힘 고증식 겨울인데도 눈 한 방울 없다고 투덜대는 딸아이와 아침을 먹는다 서해안엔 눈발이 덮쳐 기름찌꺼기도 그냥 묻혔다는데 따뜻한 밥상머리 새해 아침부터 눈 타령이다 지난가을 두고 온 만리포 밤바다가 검은 머리칼 풀어 달려든다 숟가락 놓으며 나앉는데 휘리릭, 날아드는 문자 하나 ‘기름 폭탄에 눈 폭탄에 서해안은 완전 좆되아부렀네, 그래도 신년 인사’ 서산 유 아무개 시인의 연하장이다 새까맣게 숯덩이 된 가슴으로 구석구석 바위틈 누빈다더니 그 코 평수만큼이나 넉넉한 여유, 망망대해가 그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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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살 맛
살 맛 고증식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만나 맛있는 거나 좀 먹자고 장소 메뉴는 날더러 정하라는데 장소는 그렇다 치고 암만 뒤적거려도 맛있는 게 뭔지 땡기는 게 없으니 어디 사무치는 얼굴인들 있겠나 중학교 때 읍에 따라가 처음 먹어본 짜장면 한 그릇 개울 건너 약방집 은순이 고 가시내 하얀 얼굴만큼이나 삼삼하게 아른거리던 그 맛 어느 토요일 오후였던가 이십 리 타박타박 읍내길 걸어 그 꿈같은 짜장 한 그릇 날 저물어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런 집 어디 없나 몇 십리 자갈길 달려가 만나는 사무치는 그리움 하나 그런 끝내주는 짜장면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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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아내가 절에 간다
아내가 절에 간다 고증식 딸아이와 둘이 하던 출근길을 오늘은 세 식구 나란히 집 나선다 아내가 큰 절에 가는 길 시집 와 이십 년을 벼르더니 모질게 맘먹고 하룻밤 새러 간다 -매일 혼자만 남다가 이렇게 같이 나서니 내가 둘인 것 같아, 집에 또 내가 있는 것 같아, 처음 봄소풍 따라가는 어린애 같다 얼굴까지 발갛게 물들어서는 아 어느새 잎이 이렇게 무성해졌네 한다 밤새 몇 번이나 일러 주던 낼 아침을 딸아이 귀에 다시 한 번 못 박더니 이번 절에 가면 가족을 위해 빌지 않겠단다 그럼 뭐 세계평화라도 기원할 거냐니까 아니란다 이번만큼은 자신을 위해 절할 거란다 자식 욕심 비우고 감사하며 살게 해달라고, 그래, 제발 좀 그렇게······라고 말하려다가 그게 그거지 뭐, 하고 나는 속으로만 한소리 툭 던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