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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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구두
나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잔 따라 마시고 다시 현관 앞으로 가서 구두 앞에 잠시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구두는 어제 저녁 여자가 벗어 놓은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조금 비뚤게 놓여 있는 구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게 점점 더 불길한 물건처럼 느껴지더군요. 얼른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구두에 손가락이 닿는 것조차 꺼림칙했습니다. 그 여자가 내 구두를 탐낸 거라면, 그래서 바꿔 신고 간 것뿐이라면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작 구두 한 켤레쯤은 없어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는 생각 말이에요.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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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소가죽 구두
소가죽 구두 민구 열일곱 살에 처음 산 나의 소가죽 구두는 죽은 소가 꼬리에 불붙어 일어나지 는 않지만 내가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신을 구두가 없어 두리번거릴 때면 여기 있소, 하며 매끈한 가죽을 반짝이곤 한다 금강제화 구두, 내가 돈 없을 때 벼룩시장에 내놓았다가 반품된 이 구두에서 어느 날 금띠를 두른 성경책과 너의 머리를 쓸어 주시던 외할아버지 손이 튀어나오는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혼자 벗겨진 구두 한 짝을 들고 길에 누워 지나는 이에게 시비 걸고 있으면 집에 겨들어 가소, 말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이성적인 소가죽 구두 내가 나를 사랑할 때 오르던 말하는 소에 관한 시를 자주 상상하였는데 높은 안장은 언제나 미끄럽기만 하였다 나 없는 사이에 많은 이들이 그 신을 신었을 것이다 중동의 무슬림, 떠도는 거울 속 영혼 아프리카 부족 출신의 나처럼 가난한 학생이 처음 만져 보는 구두를 신으며 등 뒤로 사라지는 소를 바라보았겠지 열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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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돌아온 빨간 구두 이야기
세상에 하나뿐인 구두, 신을 신으로 모시는 신앙이었다. 금은은 물론이고 대리석 조각이나 청동 주물, 흙으로 빚어 구운 빨간 구두 동상들이 마구 늘어났다. 구두 동상들을 집 안 한가운데에 설치해 놓고 날마다 경건하게 떠받드는 사람들도 속속 늘어났다. 누구도 진짜는 본 적 없지만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신. 사람들은 이제 다른 어떤 신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냥 빨갛기만 한 구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전지전능한 빨간 구두만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모두들 그 신을 갖지 못해 불행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 구두. 내 빨간 구두. 내 신은 어디 있는 거지?” 얼이 빠진 채 중얼거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냥 빨간 구두를 만들어 이게 바로 진짜 빨간 구두라고 남들을 홀리다 덜미가 잡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마음 약해진 노인들이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속이고 다니는 고약한 인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