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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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입술 4
입술 4 권혁웅 내가 들여다볼 때마다 우물은 출렁이며 내 얼굴을 지웠습니다 눈과 코와 귀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파경(破鏡)이 따로 없었습니다 나는 눈이 없어서 눈꺼풀이 없었습니다 코와 귀가 없어서 비린내를 맡을 수도 고백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한 깊이만 있었습니다 발을 뻗어도 손을 저어도 닿지 않는 깊이만 있었습니다 나는 거울도 없이 천착하고 또 천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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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입술 5
입술 5 권혁웅 숲의 나무들은 전지하지 않습니다 제 몸 어디서나 가지를 냅니다 산의 키를 몇 자씩 더하는 나무들 때문에 겨울 산의 윤곽은 늘 흐릿합니다 그녀가 받아주었을 때 그를 향해 함부로 터럭이 솟아났을 때 한 나무가 그를 받아 다음 나무에 넘기고 다음 나무가 그 다음 나무에 넘겨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을 때 거기엔 그도 그녀도 없었습니다 묵묵부답인 빈틈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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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사춘기
사춘기 권혁웅 인디애나 주의 단풍나무들은 17년마다 나이테를 부쩍 키운다 17년 매미가 타고 오를 수 있도록 허리와 배에 힘을 주는 것이다 이제 다 큰 매미들이 졸업식 날 교복을 찢은 아이들마냥 새빨갛게 몰려나온다 줄무늬다람쥐가 탈자처럼 매미들을 골라내도, 너무 많이 먹은 새들이 나는 걸 포기해도 매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5월은 푸르구나, 다 자란 매미들은 수컷만 폭주족이다 매미의 발음근은 소음기를 뗀 오토바이여서 인디애나 주를 미시시피 강까지 떠메고 갈 기세다 환골은 없이 탈태만 하는 그 어린것들을 위해 17년 동안 나무는 수액을 내었다 매미는 나무에 안겨 어른이 되고 사랑을 나누고 그리고 죽는다 열흘 동안의 청춘, 그 다음은 없다 그 집은 나무 위에 지어진 탓에 목관이다 1조 마리가 한꺼번에 비료가 되었으므로 나무들은 17년마다 나이테를 부쩍 늘인다 어린것들 대신에 나이를 먹었으므로 뱃살이 좀 붙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