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무언극
무언극 기혁 바다 위 출렁이는 은빛, 수갑을 풀기 위해 파도가 쉼 없이 몸부림친다. 육지에서 밀려드는 자서(自序)가 두 귀를 통과해 녹아내렸다. 파도가 죽으면, 파도의 연인과 사랑마저 죽으면, 사람들은 파도의 주검을 말리고 하얀 뼈를 빻아 장례를 치르려고 했지. 검은 심해가 떠오르지 않도록 저마다 입속에 넣고 침묵하기로 했지. 그러나 너는 좀처럼 죽지 않는 행간, 행간에 고인 슬픔의 유성음반. 햇살의 조차지 아래 은빛 수갑을 펄럭이는 배후가 없는 너 4월의 재현배우여,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동시대 문학
동시대 문학 기혁 기습적으로 다가와 여행이라고 불렀다 목적지를 몰랐지만 몸속 어딘가 방향성이 생겼다 하루하루 기차를 타는 기분으로 떠나고 있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사랑이나 죽음 따위의 종착역도 없었다 지루한 덜컹거림 속에서 같은 창밖을 보고 같은 멀미를 하곤 했다 굳게 닫힌 집들과 무덤, 반쯤 헐린 자연이 반복되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두 덩이 화물로 앉아 있었다 표면에 붙은 라벨을 읽는 것으로도 대화는 충분했다 타인의 마음까지 마중갈 수 있다면 나의 몸은 목적지가 아니길 바랬다 잠든 당신을 기습적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대설주의보
대설주의보 ― 낭광증(狼狂症) 기혁 버려진 인형 위로 눈이 내린다 버려진 강아지가 인형을 따라 눈을 맞는다 행인이 우산을 씌워 주자 인형을 물고 와 뺨을 핥는다 밤사이 폭설이 내린다고 했다 버려진 것들이 자꾸만 사람을 닮아 간다 저 여린 것들도 에둘러 안부를 묻고서 사소한 종말 따위를 알리려 애쓴다 내가 늑대였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피로 물든 일상을 앞에 두고 자주 눈을 맞았다 뜯어진 감정의 곁에서 사람의 눈알을 뜨기도 했다 버려진다는 건 얼마나 투명하게 영혼을 바꾸는 일일까 예상을 함구하기로 한다 새벽녘 새로 만난 주인처럼 눈길을 걷는다 청소차가 종량제 봉투만을 싣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