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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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길 위의 길
길 위의 길 이사라 엉켜 버린 길은 사실은 한 길인데 언제나 저만큼 저기 있는 너와 여기 있는 나 사이에서 길이란 길은 바람 불고 번개 치고 풍랑 이는 곳의 마지막 밤처럼 더 까맣고 더 뜨겁다 길은 한 길인데 떠나는 사람들, 생각들, 오류들, 길 위의 무질서들 일요일처럼 햇살들 쉬엄쉬엄 텅 빈 곳을 둥둥 떠다닌다 가만히 나뭇잎에 내려앉는 햇살처럼 어떤 햇살이든 나뭇잎들을 지독히 사랑하여 한 길의 사람들에게 나뭇잎 커다란 그늘을 내 준다 그러면 다시 옛 도시 옛 사람의 냄새 속을 헤치며 추억의 낡은 주전자처럼 끓고 있는 마음창고를 열고 나와 너 또다시 길로 뛰어든다 덜 미친 사랑처럼 그렇게 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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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길
길 김선태 고개 넘어 산비탈을 따라 길이 하나 내려오고 있다 굽이굽이 허리를 꺾으며 진양조 서러운 가락을 뽑고 있다 청산도에 봄이 와서 산도 바다도 하늘도 온통 푸른데, 하도나 푸르러서 죄없이 눈물나는데, 술취한 듯 술취한 듯 벌겋게 달아오른 길이 하나 비틀비틀 내려오고 있다 내려오다 다른 길들을 만나 중모리 중중모리로 얼크러지고 있다 서로 얼크러져 한바탕 질펀한 춤으로 바뀌고 있다 돌담에 피는 아지랑이며, 봄바람에 살랑대는 보리밭, 유채꽃밭 나비들도 덩달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저물도록 맺히고 풀리고를 반복하다 마을로 접어드는 길은 그대로 절창이다 신명나는 춤 한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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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고양이의 길
고양이의 길 이제니 그것은 조용히 나아가는 구름이었다. 찬바람 불어오는 골목 골목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라지는 그림자였다. 구름에도 바닥이 있다는 듯이. 골목에도 숨결이 있다는 듯이. 흔적이 도드라지는 길 위에서. 눈물이 두드러지는 마음으로. 흰꽃을 접어 들고 걸어가는 길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봄밤은 저물어가고. 숲과 숲 사이에는 오솔길이 있고. 오솔길과 오솔길 사이에는 소릿길이 있고. 소릿길과 소릿길 사이에는 사이시옷이 있었다. 어머니는 흰꽃처럼 나와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고양이의 길. 누구도 다른 누구의 길을 갈 수 없다는 듯이. 잡을 수 없는 것을 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다가갈 수 없는 것을 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리고 향 그리고 날아가는 어제처럼 오늘도 고양이가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고양이의 길. 얼룩무늬 검은 흰. 얼룩무늬 검고 흰. 누군가의 글씨 위에 겹쳐 쓰는 나의 글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