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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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수의
수의 김명기 6·25 피란길 저녁 무렵 지붕에서 떨어진 파편에 3급 장애자가 된 후 꽃가마 없이 족두리도 없이 휘날리는 벚꽃 주워 연지곤지 찍으며 보릿고개 넘을 때 절뚝거리는 다리보다 어깨를 받쳐 주는 새 신발이 더 불편했다던 당신 가난한 어부면 어떠랴 난봉꾼인들 어떠랴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손에 손을 잡고 인연의 눈물 꼬리 감추던 파란 하늘 꽃이 꽃을 낳듯 이 하늘 아래 어디쯤, 그래도 저마다 보듬어야 할 그리움이 있어 사남매를 뿌렸으니 어느 한 씨앗인들 세상 길모퉁이에 뿌리 내리고 제 꽃을 못 피우랴, 처음으로 막둥이가 입혀 준 새 옷 한 벌 입고 뛰어 보자, 활짝 파란 하늘이 벚꽃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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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실려 가는 개들
실려 가는 개들 김명기 해지는 초겨울 속으로 개들이 실려 간다 구멍 숭숭 뚫린 철창에 구겨진 체념 덩어리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오래전의 미래 한 번도 틀리는 법이 없는 운명이란 명확하고 지독하다 하지만 출처조차 알 수 없는 생이 이제 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뜨기 위해 있는지 감기 위해 있는지 모르는 눈처럼 어차피 출구조차 알 길 없는데 차라리 지나쳐 버린 과거라도 생각하렴 그곳에는 두고 온 한때라도 있으니 지상에 깃드는 날들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았으나 지난 한때에 마음을 모두 두고 와 그저 쓸쓸한 저녁 풍경이나 쫓아가는 몸은 참혹이란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뱉지도 못한다 어디 실려 가는 것이 개들뿐이겠나 실려 가고 끌려가는 것에겐 관용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걸 너무 오래 믿고 살았다 낡은 트럭의 속도만큼 숭고는 멀어지고 어느 몸뚱이에선가 창살 밖으로 튀어나온 때 묻은 털 깃이 한 올 한 올 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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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쉼보르스카는 모른다
쉼보르스카는 모른다 김명기 쉼보르스카를 읽는 밤. 절정이 지나도록 피지 않는 능소화와 때가 되기도 전에 피어버린 배롱나무 꽃을 생각한다. 끝과 시작 사이, 어긋난 꽃처럼 때를 찾아낸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태풍이 오고 비바람이 쳐도 방 안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나는 어떤 말에 따옴표를 쳐야 할지 모르겠다. 꽃이 피고 지는 이치를 모를 리 없지만 모른다. 두 번이 없으니 세 번과 네 번도 없겠지. 당신의 시는 너무 합당하고 인간적이라서 때로는 실망스럽다. 희망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 희망을 얘기하는 건 기만일 뿐. 저버린 희망들이 뜨거운 한낮을 피해 어깨 걸고 대오를 맞춰 걸어가는 것을 본 적 있는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기껏 뜨거운 한낮을 피하는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이제 따옴표를 쳐야겠지. '이치를 모를 리 없지만 모른다' 우린 아직 한 번도 오지 않은 절정과 때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저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 죽어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