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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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하오
하오 김선재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일어서니 저녁이었다 울던 까마귀들이 날아올랐다 나무 계단이 나뭇가지를 닦으며 내려갔다 아무도, 라고 말하면 길어지는 그림자 길어져 봤자 그림자 기다려 봤자 그림자 눈코입을 지우고 돌아섰을 때 풀숲에는 바스락거리는 숨과 검은 수면을 떠다니는 입과 순서를 기다리는 절벽이 차례차례 떨어지고 있다 상상하기 좋았다 귀는 맨 마지막에 닫히니까 모자는 남겨 두고 손이 발이 되고 덤불이 깃털이 되고 사나운 돌멩이가 가뿐하게 떠오르면 사방이 길은 아니고 버려진 우산처럼 우두커니 접힌다 내려온 만큼 가파르게 기우는 어둠 속에서 밤새들이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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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무제
나의 글에 대하여 김선재 작가는 물었다. 이 글에서의 나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나이는 몇인지 등등에 대해 너는 설명할 수 있냐고. 입이 차마 열리지 않았다. 김선재 작가는 소설은 뻔뻔하고 정교하고 치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사소한 것까지도 설계하고 써야 한다고. 워크숍이 끝난 뒤 나는 한 세상을 그대로 책 한 폭에 옮겨 놓고 내 손으로 그 세계를 하나하나 이끌어 나가는 것, 그게 소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교하지 않다면 그 세계에는 하나하나 구멍이 날 것이고, 서서히 모이는 구멍은 언젠가 반드시 눈에 확연히 드러나게 될 테니까. 나는 그 길로 노트에 끼적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설은 하나의 세계라고. 내가 만들어낸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창조물이라고. 만들어낸 이상 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나라는 사람 속에 새겨 넣었다. 까먹지도 잊지도 말아야 할 것. 소설은 하나의 세계이고 창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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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재와 심장
재와 심장 김선재 우리는 마지막 돌을 쥐고 있었다. 빛들이 바래 가는 시간이었다. 빈칸으로 낡아 가는 계절이었다. 빈 몸으로 늙어 가는 세상이었다. 알아서 지는 꽃처럼 슬픈 꿈은 아니었다. 혼자 같은 우리에게는 그저 적막한 평화가. 피 튀기지 않는 고독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말들이. 손에 쥔 말들은 각자 달랐으나 총량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는 사구처럼 어둡고 먼 곳. 우리는 손에 쥔 돌을 각자의 발밑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규칙과 벌칙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 때까지, 점점이 남은 돌들이 점이 될 때까지, 누구도 그립지 않았다.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규칙을 기억한다. 어두워지면서 가벼워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버릴수록 붉게 달아오르던 한때를 기억한다. 희고 뜨겁던. 희미하고 분명하던. 나보다 더 나인 것 같던. 돌들이 자란다. 돌들만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