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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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사랑, 같은 소리(3)
매번 변하는 것 같고 유연하며, 상대적이고 때론 조화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이렇게 사랑은 필연적으로 독선적이며, 그렇기에 어딘가 잠시 고정되었다가 곧 어디론가 미끄러지는 기이한 운동이다. 미끄러진 것이 한 곳에 머물러 고이면, 어떤 도식이 생겨나게 되며, 이 도식은 물론 사랑이 아니라, 친애가 되거나, 욕망의 형태로 분출된(될) 행위의 개연성을 끌어안을 뿐이다. 어쩌면 사랑보다, 친애가 더 선하고 훌륭한 것일 수 있으며, 욕망이 사랑보다 더 구체적이고 솔직한 것일 수 있다. (남자들에게서) 섹스로부터 사랑을 견인해낼 방법은 없는 것일까?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마법을 부려, 전기 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참새나 질척한 빗길에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고도 마구 흥분하게끔 그들을 개조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남자는 사랑에 있어서 사람이기 어렵다는 말일까? * (계속) 《문장웹진 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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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돈이여, 숫자여, 길과 숙소로 바뀌어라
꿈꾸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 쿠바와 남미의 나날들 #1 돈이여, 숫자여, 길과 숙소로 바뀌어라 김성중(소설가) 1. 눈뜨고도 꿈꾸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너무 좋아서라기보다 비현실적이어서. 지금이 정확히 그렇다. 불 꺼진 밤비행기 안에서 맥주를 쏟지 않으려 조심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쿠바행이 결정된 것은 거의 일 년 전이다. 일찌감치 흥분을 소진한 탓에, 막상 떠날 때는 뚱하게 가라앉아 있다가 허둥지둥 비행기를 탔다. 외국 작가들의 연보를 읽다 보면 나라의 지원으로 어디어디를 다녀와 무슨 글을 썼다는 말이 간혹 나오는데, 외국이니까 그렇겠지 했다. 한데 우리나라에도 작가들을 해외에 보내 주는 프로그램이 생겨났고 운 좋게 지원한 나라에 선정되었다. 3개월간 내가 머물게 된 나라는 무려 쿠바. 맙소사! 쿠바라니. 행운의 신이 졸다가 가지고 있던 대야를 내 머리에 쏟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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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베다도 백수 일지(제4회)
꿈꾸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 쿠바와 남미의 나날들(제4회) 베다도 백수 일지 김성중 1. 카리브해의 기적 아바나의 베다도를 벗어나 히론과 시엔푸에고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쿠바의 연인〉이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진 정호현 언니가 이곳에서 한-쿠바 협회 일을 하고 있다. 그곳 직원들이 관광 상품 개발차 떠난 여행에 나도 묻어간 것이다. 덕분에 일 년의 마지막 며칠을 그림 같은 바다와 한적한 지방에서 보내게 되었다. 봉고차 한 대에 여자 넷과 다섯 살짜리 남자 아이로 이루어진 우리 일행은 악어농장에 들러 점심을 먹고, 중국단체관광객의 서슬에 밀려 결국 보트 타는 것을 포기한 채 곧장 ‘히론’이라는 해변으로 왔다. 아바나에서 세 시간쯤 떨어진 바닷가인데 가는 길부터가 환상적이었다. 예전에 이집트에서 시와 사막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사막을 찾아가는 길은 그 중간부터가 이미 사막이어서, 도착 전부터 이미 압도당한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