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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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백합의 밤이 되러 갔다
백합의 밤이 되러 갔다 김연아 한 남자가 아이 손을 잡고 얼음길을 간다 갓 다림질한 셔츠 냄새를 풍기며 아래는 그늘을 드리운 못이 입을 벌리고 있다 솨,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추락한다 못 속으로. 입 속으로. 마, 메, 미, 모, 무 끝없는 소리가 웅성이다 사라져 간다 나는 침대에 누워 듣는다 내 심장에서 사라져 가는 목소리를 듣는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울린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조금 차갑고 북구의 빛에 물들어 있다 흰 벽에 붙여두고 보았던 북극 지도 아버지와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 얼어붙은 비누거품 같은 땅 그는 날씨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고 나는 꿈속에 울었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투명한 상자에 담겨 있다 아이의 배냇머리로 만든 붓과 함께 건너갈 수 없는 북해 속에서 파란 보랏빛 석양이 운다 자신의 목소리에서 물러나 그는 백합의 밤이 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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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날개
날씨의 신이 붉은 달빛 탓에 살짝 돌아버린 것이다. 안개에 가려진 여자는 길고 긴 불행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거주지로 돌아온 여자는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만약 거인이 거기 있다면, 밖으로 꺼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럴 힘을 가진 유일한 존재는 의회였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의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독립된 전력회사도, 지하철공사도, 방송국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법정이라는 장소도 판사라는 직업도 사라졌는데, 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류가 이미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누가 잘못했으며 어떤 보상을 해야 하는지는 의회에 보관된 엄청난 분량의 디지털 판례 정보를 열람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건 이 소설과 관련이 없고, 어쨌든 여자는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누구나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여자는 교사, 즉 의회 소속기관의 직원이었다. 두 시간 후에 여자는 거절의 통지를 받았다. 여자는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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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나무인간 증후군
처음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적잖이 당황했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의식적으로 논쟁을 피했고, 더 이상의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점을 도리어 기쁘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되자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부분 치료가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치료제로도 치료가 쉽지 않은 중증의 나무인간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네모 그룹 산하의 메디컬 센터로 이송되었다. 이들의 수는 전체 환자 비율의 일 프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조사 결과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병의 진행상황을 보며 염려해 줄 만한 가족이나 친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가정사나 사고, 지병으로 가족과 일찍이 헤어졌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오랫동안 혼자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