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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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비와 통, 뿔과 닭
[내가 읽은 올해의 책] 비와 통, 뿔과 닭 ─ 『뿔바지』, 자끄 드뉘망(김태용), 2012 한유주 나의 이름은 안입니다. 본래는 한이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나 안이라고 발음하더군요. 이 글은 여행자들을 위한 사무실과 우체국이 있는 광장에 있는 싸구려 카페테리아에서, 이곳의 모든 음식 값을 합한 것보다 몇 배쯤 비싼 만년필로 쓰고 있어요. 2012년이 가고 있군요. 2013년이 오고 있나요? 노란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청소부들 여럿이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어요. 나의 뒤편에서. 나의 앞에는 커피 한 잔과 만년필, 노트, 당신의 책, 소금통과 후추통, 어둠, 나의 두 손, 그리고 만년필을 위한 가죽집이 놓여 있어요. 이 가죽집을 불란서어로는 에튀라고 부르는데, 당신도 이 단어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의 국적에 대해 여전히 분분한 의견이 오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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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작가인 동시에 독자인 사람의 노래
[내가 읽은 올해의 책] 작가인 동시에 독자인 사람의 노래 ─ 이승우, 『지상의 노래』 서유미 소설을 쓸 때는 독서를 자제하는 편이다. 좋은 소설을 읽게 되면 쓰고 있던 글이 형편없이 느껴져서 의기소침해지기 때문이다. 또 독서의 달콤함에 빠지면 소설쓰기를 작파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올라서 의도적으로 멀리하기도 한다. 그렇게 단속하는데도 열심히 써야 할 때는 읽고 싶은 책이 넘쳐나고, 작정하고 독서를 시작하면 뭔가 써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상황은 반복되었다. 그래서 하루를 반으로 접어서 낮에는 읽고 밤에는 쓴다거나 일주일의 전반부는 읽고 후반부는 쓰자, 라고 정해 보기도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요즘은 마감이 끝나거나 책을 낸 후에 독서목록을 짜고 독서기간을 정해 놓은 다음 몰아서 읽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언제 또 바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독서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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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등울음의 기록
[내가 읽은 올해의 책] 등울음의 기록 ─김주영, 『잘 가요 엄마』 해이수 원고청탁을 받은 곳은 미국의 필라델피아였다. 그날 나는 영화 〈로키(Rocky)〉에서 그 유명한 사운드트랙을 배경으로 주인공이 뛰어오르던 미술관의 계단을 오르내렸다. 트레이닝을 받는 한 무리의 운동선수들은 숨을 거칠게 토해 내며 수백 개의 계단을 빠르게 왕복했다. 미술관 한쪽에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챔피언의 청동상이 서 있었다. 영광의 제스처인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벌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승리자(winner)는 자신에게 끝없이 벌을 주는 징벌자(punisher)일지도 몰랐다. 귀국 후 나는 서가에서 올해 출간된 책들을 따로 뽑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것은 작가의 응결된 시간이자 그들 목숨의 일부였다. 최근에 장편을 집필하며 나는 작가와 창작에 대해 새삼 고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