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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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피팅
소희 책상 옆에 있던 행거가 넘어졌다. 아래 놓여 있던 휴지통이 행거에 부딪쳐 멀리 날아갔다. 품평회에 쓰일 가방이며 벨트, 브로치나 액세서리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부자재들이 잔뜩 걸려 있던 행거가 균형을 잃고 쓰러진 듯했다. 하나실장이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스타일벨트도 보였다. 구겨져 떨어져 있는 부자재들을 하나씩 주워 행거에 걸었다. 의류는 없었다. 소희도 다음 FW 시즌에는 기본 바지나 치마 하나쯤 디자인할 수 있을까. 낮에 피팅실에서 주워 가방에 숨겨 둔 브로치를 꺼내 행거에 같이 걸었다. 소희 책상에는 디자이너들 핀꽂이가 스무 개쯤 놓여 있었다. 늦게까지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다 퇴근 전까지 핀을 꽂았다. 미처 못 꽂은 핀꽂이들은 쇼핑백에 담아 집으로 가져가는 것 같았다. 핀꽃이를 뒤덮은 저 핀들이 내일도 내 살갗을 파고들 것이다. 바느질이 덜 된, 핀이 꽂힌 옷들을 입고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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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없는 사람
내가 택시에서 내리자 그 애가 다가오더니 “소희?” 하고 불렀다. 얼굴을 보면 뭐라도 떠오를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 애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이름만 흔한 게 아니라 얼굴도 흔했다. 묘사하기 어려운 얼굴. 특징이 없는 얼굴이었다. “어, 민정아. 나 소희야.” 나는 어색하게 말했고, 그 애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민정에게서는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아니 소독약 냄새인지도. 사실 나는 그 둘을 구별하는 게 좀 어려웠다. “밥은 먹었어?” 그 애가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오늘 처음으로 고개를 저어 보는 것 같았다. 민정의 집은 원룸이었다. 크기는 데뷔 조 숙소의 방 하나와 비슷했다. 방의 한쪽에는 책상과 의자가, 다른 한쪽에는 프레임 없는 매트리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창을 가린 누르스름한 커튼 위로는 앵두 전구가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딘지 처량했다. 문이 열린 화장실에서는 락스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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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다른 방
다음 주부터 새로운 사람이 올 거예요. 제가 출산 휴가에 들어가게 되어서요. 소희는 B시의 주무관이 임산부였다는 걸 전혀 몰랐다. 평일에 거의 매일 통화하는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지금까지 점점 불러 오는 배를 안고 출퇴근을 해 왔다고는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축하한다는 인사에 주무관은 사무적으로 웃고는 구십 일 뒤에 봬요, 하고 끊었다. 구십 일이구나, 출산 휴가가. 중얼거리던 소희는 휴대폰에 온 메시지를 발견했다. 소희야 지금 집에 있어? 뭐라고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뭐 좀 가지러 가려고! 소희는 얼떨결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쯤 가고 나서야, 아무리 집주인이라도 빈집에 올 리는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끊을까 망설이는 순간 주아가 전화를 받았다. 주아는 실내 자전거를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해체부터 운반까지 그 친구가 알아서 할 테니 문만 열어 주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