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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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안국동울음상점 외 3편
눈보라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12월, 너구리 가죽 가득 눈꽃들을 받아주겠다고 손녀딸의 잠을 툴툴 털어 주고 계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선생님, 우와, 하고 입을 쫙 벌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조직 폭력배, 동승, 소설가 김씨, 사실은 순진했던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국회의원 양반, 통속적인 활극을 연출하는 너구리 삼인조, 왁자지껄, 수한무를 찾는 숨이 넘어가는 만담, 모두가 즐거운 한때, 눈은 쌓이는데, 두런두런 유년을 찾아가는데, 종종 미끄러지는데, 청어를 굽는데, 날치 알을 먹으며 깔깔대는데, 하얀 눈은 아랫마을을 재우고는 재 너머 공동묘지에도 내리는데, 썩은 굴참나무 그림자에 빠져 죽은 수상한 허물들 위에도 내리는데, 누군가 죽은 친척 이야길 꺼내 시무룩해졌다가는, 다시 만월(滿月)의 잔이 도는데,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중 「어떤 갠 날」도 좋고, 음정 박자 무시한 「한 오백 년」도 좋은데, 엉덩이춤을 추는데, 정부도 없고 계급도 없고 빈부마저 없이 너구리 가죽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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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단편소설] 톨게이트
정작 본인은 운전을 할 줄 모르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차를 운전하고 다녀서 그 동승 경력만 십 년이라고 했다. “이 길로 죽 가서 우회전을 하면 1차선의 좁은 길이 나오는데, 거기는 아파트 단지 바로 옆이라 요철이 많아. 계속 가다 보면 우측으로 올라가는 진입로가 나오고 거기로 올라가면 바로 둑방길이거든. 둑을 따라 계속 달리란 말야. 그게 우리가 왔던 길 아래편으로 이어져서 너희 집 근처까지 가.” 나는 알겠다고 말했다. 친구는 손을 흔들고는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차의 시동을 걸고 담배를 껐다. 나는 친구가 설명해 준 대로 차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직진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설명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길을 잘못 찾은 건지, 그날 나는 길을 잘못 들어서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까지 나가게 되었다. 우회전을 했을 때 1차선의 좁은 도로가 나오는 건 맞았다. 그 길이 아파트를 끼고 있어 요철이 많은 것도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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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욕조 안의 볼드모트
사악한 마법사 볼드모트는 자녀의 동승 유무와 상관없이 음주운전을 했던 사람이다. 그럼 우리는 왜 밤마다 방패막이를 자처하며 볼드모트를 따라 계곡을 갔던 걸까? 도대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쨌든 볼드모트는 빠르게 떠내려가는 물에서 나를 건져냈고,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나는 도랑에 처박힌 순간이 기억에 전혀 없었다. 그때부터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걸까? 뇌 손상이 일어났던 걸까? 대신 볼드모트가 나를 안아 올린 이후의 일들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물을 먹은 청재킷 때문에 온몸이 무거웠고, 머리가 따끔거려서 더듬어 봤더니 정수리 아래쪽에 오톨도톨한 게 만져졌다. “나 언니 두피에 박혀 있던 큐빅만 한 크기의 검정색 조약돌이 아직도 기억나.” 동생도 스쿠터를 보고 새삼 추억이 샘솟았는지 그렇게 말했다. “부분 삭발하고 두 바늘인가 꿰맸지.” 그 후 7년간 내 뒤통수에는 조그만 땜빵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