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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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만천동 야사
아슬함도 아련함도 이 거리는 언제나 저마다 섬겨야 할 사연이 있어 가난도 때론 온기로 아득한 순간들이지요 저것 보아요 오늘도 화두 하나 움켜쥐고 동해 길 주름 펴며 슬금슬금 담장을 오르는 햇살 넝쿨손이 낑낑 받쳐 주는데요 어젯밤 담장 아래 모여 수군거리던 옆집 이야기가 칭얼대면 떠나간 노란 버스 뒤에 서서 아무 일도 아닌 듯 눈인사하네요. 오늘 오전에는 잠시 여우비가 내리겠지만 바람은 동해 선상으로 외출 중이므로 우산은 간지런히 접에 주머니에 넣어도 된다고 코스모스가 툭, 툭, 제 몸 이슬을 털어내는데요 어쩌면 시월 하늘 정수리에 발목을 빠트려도 골목 어귀가 온통 찡하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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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숨겨진 보물 같은 책이야기]작은 공의 굴림이 큰 꿈을 만든다
그렇게 방학 동안 춘천-강릉-동해-삼척-태백-울진-영덕-포항-울산-부산-창원-거제-통영-고성-사천-진주-하동-광양-순천-여수까지 걸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걷는 모습을 보고 태워주기 위해 일부러 주유소에 들러 나를 기다린 아저씨, 글을 쓴다니 환선굴 앞에서 시를 읊어달라던 가족까지 안락함을 포기한 대신 많은 경험과 행복을 얻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도 등장인물들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지만 지나칠 정도의 삶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들만의 행복과 부를 쌓으려는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을 보일지언정 지나친 욕심을 탐하는 사람이 없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은 「뫼비우스의 띠」이다. ‘무한의 고리’인 시작과 끝이 없는 이 연작은 교실의 수학 시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내려왔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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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훈장 (4) 딸년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박스를 찾은 영감땡감은 입맛이 동해 아까부터 밥 타령이다. “이사하는 날은 자장면도 맛있고 짬뽕도 맛있어.” 아침을 헛손질하다 말았으니 시장할 만도 했다. 그렇다고 체신머리 없이 딸년 앞에서 밥, 밥 해대는 것은 우세스럽다. 어떤 극심한 고통일지라도 제 안에 두고 잘 내색하지 않는 딸년이다 보니 자식이라도 어쩔 땐 어렵다. 사위 일만 해도 그렇다. 그토록 마음고생이 자심하면서도 제 그늘 아래에다만 두었다. 요새 젊은것들 같으면 진즉 친정으로 달려와 사네 못 사네 울고불고 난리쳤을 것이다. 딸년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해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반장의 권한은 막강했다. 칠판에 떠든 아이들 이름 적기, 숙제 검사하기, 자율학습 시키기, 청소 감독, 심지어는 체벌까지, 거의 담임 선생의 권한을 대행했다. 3월의 어느 하루 청소 시간이었다. 반장에게 청소 감독을 지시해 놓고 담임 선생은 교무실에 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