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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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미로
미로 박주택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일 주일 남짓 세상과 절연된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깊은 산 속 숙소에 감금된 첫 날의 풍경이었다 산책조차 감시를 받으며 나가는 이틀째부터 사람들은 얼음장이 녹아 해동되듯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삼일째가 되자 사람들은 이 방 저 방에서 웃음으로 왁자하고 복도는 마주치는 시선만으로도 서로 동지가 된 듯 했다 방에서는 머리를 맞대며 세상을 시험할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느라 잠과 씨름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전우처럼 결사대처럼 불타올랐다 세상은 산 속 숙소가 전부였다 밥과 문제와 산책이 전부였다, 마지막 날 저녁 사람들은 큰 방에 모여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불안을 어떤 이는 부인을 어떤 이는 부모를 어떤 이는 빚을, 마치 세계에서 쫓겨 나온 사람들처럼 투덜거리며 웅성거렸다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다시 말이 없었다 두 시간을 걸쳐 오는 동안 점심처럼 내내 침묵을 지켰다 감정의 소비자처럼, 묵묵히 창문만을 내다보았다 때 맞춰 날이 흐리더니 눈송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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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미궁과 미로
미궁과 미로 이치은 1. 미궁(迷宮, Labyrinth)-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 내가 어느 순간 최고의 수학자들과 회계사들을 동원하여 미분방정식이라도 돌리지 않는 이상 찰나의 내 재산이 얼마인지 도저히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부자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부터 나는 더 많은 그리고 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사진가 G였다. G는 주로 건물을 찍는 사진가였는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판에 박힌 듯한 구도로 평범해 보이는 건물들을 찍었다. G와 알게 된 후 그의 사진전에 몇 차례 초대 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가끔은 더 엉뚱하고 더 유쾌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만 빼면 실은 썩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의 사진은 대체로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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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미로」외 6편
미로 류현 문진표 작성란에 여름을 기다린다고 적었다 꽃이 피는 시간에 나는 맹인에 가까웠으므로 화려한 조명이 쉽게 진흙탕의 발자국을 지우고 밝아지는 표정을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는 등 뒤로 폭풍이 몰아쳤고 나는 친구들을 만나러 숲으로 가고 싶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커다란 덤프트럭이 하얀 선을 무참하게 비트는 걸 목격했다 충돌이란 드러낸 속내를 감당하는 것 비명은 예고 없이 누군가의 희망을 낚아채 무성한 별들의 이름을 만들었다 숲은 사라지고 사람이 우거진 곳은 미로와 같아 인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빛의 노숙자가 되어 밤새도록 잭의 콩나무를 읽었다 북향의 틈새에서 기형의 자세로 자라 하얗게 질려 가는 빈칸에 새라고 적었다 크림 브뤨레 내 취향은 설탕을 태우는 것 철들지 말라고 내 머리에 설탕을 뿌리던 할머니를 이해해요 무엇이든 절여야 오래 가질 수 있었던 그녀에겐 위험한 주문이었죠 서랍을 열면 튀어나오는 질문 때문에 불편한 옷을 입어야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