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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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언덕배기 소나무
언덕배기 소나무 박형권 천 년을 걸고 소나무가 가고 있다 소나무의 아이들이 한 걸음 가고 아이들의 아이들이 또 한 걸음 가고 소의 걸음으로 가고 있다 물푸레나무가 물을 길어 주면 한 모금 마시고 가고 있다 어떨 때는 한 오백 년쯤 그윽해졌다가 땔감이 되었다가 집이 되었다가 팔만대장경이 되었다가 멈춘 듯하여서 보면 가고 있고 가는 듯하여서 보면 멈추어 있다 나의 초여름, 마을 앞 언덕배기의 해송이 가면서 한 번씩 사람 사는 마을을 보아 주었다 가다가 나를 만나면 그냥 백 년만 바라봐 주었다 백 년 그것 아침인사 드리기에도 짧은 순간이지만 천 년인 듯 나를 바라봐 주었다 소나무에게 나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집착 없는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이 저마다 작동하여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야심경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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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생활쓰레기매립장 가는 길
생활쓰레기매립장 가는 길 박형권 어제 나는 먹다 남긴 치즈 조각이었다가 오늘은 어디를 덧대어도 더러움을 빨아들일 수 없는 행주 조각이 됐다 유월 아카시꽃 주르르 흐르는 이 길은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길 꽃 따라 마지막으로 향한다면 그리 섭섭할 것은 없다 생활쓰레기매립장이 산중턱에 있어서 오르막을 오르면 내가 탄 오물 칸에서 운명처럼 꽃이 진다 나는 한때 잘나가는 사내의 백구두였고 결혼식장의 흰 목장갑이었고 처녀의 허리를 죄어 주는 코르셋이었고 뒷산 소쩍새 소리를 듣는 이어폰이었다 가끔은 애인이 나를 발견하게 되는 안경테였다 아주 잠깐이었다 꿈속의 꿈이었다 나는 생활쓰레기로 분류되어 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이 사는 세계에서는 당신이 당신을 분류하고 다른 당신이 다른 당신을 분류한다는 것을 분류하다가 끝나는 인생과 분류되다가 끝나는 인생, 단 두 종족만이 남았다 나를 실은 위생과 트럭이 느리고 힘센 기어로 변속하고 초여름을 뻘뻘 흘리며 기어오른다 싱크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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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산수박
산수박 박형권 할머니는 손자에게 일 시키지 않고 산 아래 밭까지 꽁지 물고 따라오는 것 대견해하시지 털매미 노래가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로 들리고 멀리 바다에는 통통통통 전마선 한 척 게으르게 지나가지 혹시 부산에 신발공장에 일 나간 엄마가 고기 한 근 끊어 올지도 모르는 신작로 옆구리엔 땀이 삐질삐질, 배꼽시계가 정오를 가리키지 꼬르륵 꼬르륵 눈치 없게시리 배 안에서는 개구리가 울고 할머니 호미날에는 감자알만한 돌멩이가 이마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지 이 꿩 저 꿩 이 산 저 산 구운 콩은 다 먹고 사르르 잠이 찾아오는 묵정밭 길어진 밭이랑을 참다 참다 할머니 산그늘에 들어가 쉬이 소피를 보시지 졸졸졸 개울물소리 끝에서 할머니 이리 오너라 손 흔드시고 투덜투덜 몇 발 안 되는 여름은 뜨거워라 할머니 부끄럽게 산자락을 적신 그 뜨뜻한 공백 옆에 덩그렇게 놓인 산수박 한 통 눈도 밝으신 우리 할머니 퍽 쪼개면 새까만 씨앗들, 우리 씨 할 고추 어서 많이 먹어라 우리 할머니 산수박 낳으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