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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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감수(十年感秀)_시 비 이성미 담장과 담장 사이 넝쿨과 넝쿨 사이 그의 어깨와 그녀의 어깨 사이 뭐라 부를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비 고개를 뒤로 꺾고 보는 날 첨탑 옆에는 무엇이 떠다니는지 전깃줄은 어디로 달려가는지 발가락이 젖어 알게 되는 날 아스팔트 길 어디가 꺼져 있는지 진흙 땅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동안 잠자코 있었지 창문 밑엔 버려진 자동차 양철 지붕 위엔 미루나무 안 가본 데로 비의 손가락을 따라다니는 날 물웅덩이만 잠시 기억할 뿐 사라지는 세계 –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문학과지성사, 2005)에 수록 추천하며 이 시가 보여주는 세계를 차분히 따라가 보면, 물에 흠뻑 젖은 것뿐만이 아니라, 무수히 쏟아지는 빗줄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그 가리킴에 응하려는 시인의 태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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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비
비 백무산 나는 내린다 꿈은 언제나 솟아오르지만 쉼 없이 쏟아져 내린다 처음엔 과열된 꿈을 식히는 존재의 낭만적인 슬픔인가 했더니 속도는 번득이는 모서리들을 허물더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낙하하더니 눈물보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더니 난파선처럼 나를 허물기 시작했네 손에 들린 것 몸에 실린 것 애당초 몇 푼어치 되지 않았던 것들도 마음으로 들고 있던 억만금도 태산도 내던졌네 내던지고서야 속도가 늦추어지네 멈칫 비눗방울처럼 덩실 떠올랐네 그러자 바닥이 달려오네 사막과 타는 자갈밭이 달려오네 이마에 가까워 오네 남은 일은 종말을 기다리는 일 산산이 부서지는 일 뛰어들 곳을 찾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안개 속에 어렴풋 잿빛 강이 보이네 안간힘을 다하고 눈을 찔끔 감았네 억겁 시간이 흘렀고 눈을 떴을 때 누군가의 따듯한 두 팔에 안겨 있었네 출렁이는 젖가슴 같은 강이었네 송곳 같은 내 숙명을 둥글게 감아 안는 강 같은 품이었네 하류로 흘러와서 생은 기도처럼 숙연해져 낙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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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뛰어다니는 비
뛰어다니는 비 안현미 수협 조끼를 입은 남자가 박카스를 돌리자 대게철이 시작됐다 주황색은 어디서 왔을까 달을 찍고 싶었으나 귤을 찍는다 인생이 대개 그와 같다. 호불호를 떠나야 한다 여자도 남자도 극복해야 한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초대된 우리들 내 불행은 내가 알아서 할 것 대게는 대게로 고양이는 고양이로 나는 나로 죽을 것이다 할머니라고 아홉 번이나 불렸고 삼만 살처럼 피곤해도 소만(小滿)에는 립스틱을 사자 동문하고 서답하자 내 물음과 내 울음은 내가 알아서 할 것 주황색은 어디서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