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8)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내실(內實)을 다진다는 것
내실(內實)을 다진다는 것 안상학 봄에 사다 심어 놓은 매화나무 이내 꽃잎 내려놓더니 겨우 내민 것 같은 새순도 물기 거두고 그 몰골에 버거워만 보이더니 매실 두엇 노랗게 만들어 부려놓고는 숫제 여름내 삐들삐들 마른 잎 몇 달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달 것도 없이 선 채로 자리보전하고 있다 거름도 주고 아침저녁으로 물도 주며 내도록 지켜봐도 곧 죽을상이다 매실농사 짓는 신부님께 문진했더니 새 땅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지만 추운 날 다시 꽃 피우려고 벌써부터 속으로 꽃눈 다지는 데 애 쓰느라 그러니 걱정 말라 하신다 내실을 다진다는 것, 성장(盛裝)을 마다하고 새순까지 말려가며 속으로 저렇듯 꽃물 들이고 있는 저 내실을 다진다는 것, 다 진다는 것 다 지운다는 것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옥탑
옥탑 하종오 앞집 옥탑은 처마를 달았으니 방이고 그 앞집 옥탑은 커튼을 둘렀으니 개집이고 그 앞집의 앞집 옥탑은 연통을 냈으니 온실일 게다 날마다 갈 데 없는 나는 옥탑에 올라 내다보았다 햇볕 따스한 날엔 앞집 옥탑 밖에서 젊은 부부가 손잡고 울음을 참았고 바람 부는 날엔 그 앞집 옥탑 밖에서 성대 수술 받은 애완견들이 나와 교미 붙었고 비 오는 날엔 그 앞집의 앞집 옥탑 밖에서 성장 억제 당한 분재들이 나와 빛깔을 섞었고 내가 옥탑 밖으로 나오면 모두 슬그머니 들어가 버리던 것이었다 사방 이웃집 옥탑에도 무엇인가 한 채쯤 들어 있을까 어스름에 싸여 식사하고 싶은 사람은 식탁을 옮겨놓았을 것이다 밤하늘을 보며 잠들고 싶은 사람은 간이침대를 펴놓았을 것이다 허공을 딛고 싶은 사람은 새의 둥지를 꿈꾸었을 것이다 나는 옥탑에 올라가면 집들이 바닥을 대고 있는 땅으로 내려가 갈 곳을 찾고 싶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영감의 화수분, 도스토예프스키
성선설을 믿는 나로선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가, 철저하게 계획된 악마의 장난이 아닌 다음에야 범인의 심층 무의식에 켜켜이 똬리 튼 증오와 뼈저린 고독, 성장 과정이 궁금했다. 범죄보다 그런 여러 가지 주변 상황에 초점을 맞춰 조각 그림 맞춰 가듯 써 보고 싶었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는 동안 자연스레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떠올랐다. 곧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오한 사상과 관념, 시대를 반영하고, 앞날을 예견한 작가적 혜안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휘청였다. 리얼리티가 번뜩이는 현실과 추상적인 관념의 내면이 교차되면서 인간의 무의식에 현미경을 들이댄 듯 탁월한 심리 묘사와 긴박한 구성, 하나같이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이 얼키고설킨 소설을 써낸다는 것이 나로선 불가능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어쨌거나 초안을 잡는 의미로 단편을 써서 발표했고 언젠간 장편으로 늘려 쓸 계획이며 구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전천후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