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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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도마뱀 세상
도마뱀 세상 김지유 모래늪에 빠진 도마뱀 구경하러 오세요 꼬리로 몸통을 자르는 도마뱀, 독사에게 두 발 달아주고 호들갑 떠는 김부장 세 치 혓바닥 요리 맛보러 오세요 해고는 독사보다 교활하게 이번 참에 싹둑 잘라 버려야 한대요 살생부를 출력하고 계신 도마뱀에게 눈맞추러 오세요 꼬리로 몸통을 자르지 못하면 생매장 당해야 하는 처자식 먹여 살리러 오세요 피 한 방울 없이 비명도 감동도 없이 모래방석 깔고 앉은 선인장에 눈물 주러 오세요 당신은 독사보다 고독하게 자위 중이신가, 이번 참에 꼬리 대신 몸통을 잘라 버려야 해요 꼬리만 남겨 모래늪을 빠져 나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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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그들만의 세상
그냥 혼잣말하듯이, 세상 참 편리해졌구나, 영화를 집에서 다 보다니……. 컴퓨터란 게 이런 거구나. 요즘은 왜 옛날처럼 눈이 안 오냐, 인제 봄이구나……. 이런 식인 거지요. 내가 항상 할아버지에게 묻는 편이었죠. 할아버지 중국집에서 시킬 건데요, 뭐 드실래요, 비디오 틀어드릴까요, 바둑판 찾으세요, 전화 왔었는데요……. 한번은 제가 가끔 맞는 주사약을 놓으러 간호사 누나가 집에 왔습니다. 난 이제 약이랑 주사엔 이골이 나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가만히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한 말씀 하시더군요. -그거, 모르핀 같은 거요? -예? -감각을 둔하게 하는 약이 아니냔 말요? -글쎄 그런 것도 좀 있지만, 그래도 웅호가 장기간 치료를 받아서 이건 꼭 필요한……. -당장 그만 두시오. -네? 할아버진 애 정신력을 좀먹게 하는 건 마약과 같다고 꼬장꼬장하게 일갈하셨고, 간호사 누나랑 엄마는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납득시키려고 애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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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그 여자의 세상
그 여자의 세상 이인휘 시월 중순이 지나면서 안개가 새벽 강 위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가벼운 바람이 푸른 여명의 빛을 타고 강을 따라 모여 있는 마을로 안개를 밀어 올렸다. 연기처럼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잠들어 있는 집들의 벽을 타고 올라갔다. 강과 산 사이에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도로 위로 손을 뻗치며 안개는 산 중턱으로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구급차 한 대가 요란스러운 불빛으로 안개를 헤치며 부유면 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점박이 여자 죽었대.” 아침 햇살이 산을 넘어 올라왔지만 안개는 하얀 이슬비처럼 날고 있었다. 뿌연 거리 속에서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한 여자의 죽음을 아침 인사처럼 건네고 다녔다. 오전 내내 질기게 남아 있던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밝아지자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흥밋거리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십여 년 전 삼십여 가구가 모여 있는 정산 마을로 여자가 들어왔을 때도 사람들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