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33)
-
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아동청소년문학 홍의 소녀
홍의 소녀 박채현 둥둥! 둥둥! 둥둥! 북이 울렸다. 온 마을을 깨운 북소리는 세간마을의 끝 집 은봉이네까지 들렸다. “어매요, 빨리, 빨리 오이소.”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정암진으로 떠난 지 이틀 만이었다. “우리 의병이 왜군을 섬멸했다는 소식이오.” 깃발을 앞세우고 의병들이 줄지어 마을로 들어왔다. 옷은 흙투성이에다가 몸은 지쳤건만 의병들의 표정은 밝았다. “장군님 만세! 의병 만세!”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곡주를 들이켠 은봉 아비가 입을 열었다. “왜놈들이 마른 길에 푯말을 꽂아 둔 거라. 장군님이 그 푯말을 늪으로 옮기라 했거든. 우리는 언덕 위에서 숨어서 지켜봤지. 왜놈들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장군님의 신호가 떨어진 거라. 와아! 달려들어 왜놈들을 전멸시켰다, 아이가. 허허허.” “아부지, 참말로 신납니더.” 은봉이가 부추기자 아비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 소설’1) 리라이팅을 통해 생각하는 근대 소설(novel)의 변화 김미정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는 그것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소용돌이가 멈추고 낙진이 잦아들 즈음, 변형된 지형지물과 그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켜켜이 쌓여 가는 시간의 무늬는 다시 새로운 지층을 이루고, 그것은 또 다른 소용돌이를 만날 때까지만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훗날 교정되어야 할지 모를 오류에마저 몸을 내맡겨 보는 일이 어쩌면 비평의 일이다. 1. novel 혹은 근대인의 인식 체계 이 글은 지금 소설(novel)이라는 장르를 둘러싼 어떤 소용돌이의 체감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야기의 양식이 모두 동일할 리는 없다. 그 양식을 무어라 부르건 거기에는 늘 각 시대의 인식·정서 체계가 구조화되어 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세이렌의 초상①]벌거벗은 채 서있는 흑발 소녀
[세이렌의 초상①] 첫 번째 이야기 - 벌거벗은 채 서 있는 흑발 소녀 김이듬 오늘처럼 무더운 날이었다. 뱃고동이 울렸고 내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악취 진동하는 산동네 골목 계단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먼 바다가 보랏빛으로 변해 가는데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점심때 할머니가 내 머리칼 이 몇 마리를 잡아 눌러죽이고 그 피가 묻은 손톱으로 껍질을 벗겨 드시다 밀쳐놓은 감자 몇 알, 난 그걸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한입 베물고 던져버렸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갓난아이를 안은 이웃집 아주머니가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들을 얻을 때까지 딸 넷을 낳은 여자였다. 그녀의 약아 빠진 둘째 딸이 그 뒤를 촐랑거리며 따라왔다. 딸기향이 나는 빨간색 아이스케키를 빨아먹으며. 돈줄도 인심도 수돗물도 말라 가는 동네에서 그런 걸 먹을 수 있는 애는 흔치 않았다. “얘야! 이거 먹을래?” 부라보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