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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 시조 - 지배적인 정황과 시적 순간의 층위
기획특집┃현대시·시조
지배적인 정황과 시적 순간의 층위
조동범
자, 이제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하지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얼마나 식상한 것이던가. 시에 대한 정의가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것은 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고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시적인 것에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시에 대한 정의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가 문학론의 대부분을 차지해 올 만큼, 시는 문학의 문제에 깊숙이 침투해 있으면서도 아직 애매한 개념으로 남아있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민음사, 1976, 157쪽.)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시가 여러 예술의 층위를 아우르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어려움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 분명하다. 물론 시를 소설 등의 산문과 다른 글로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분명히 시는 소설 등의 산문과는 다른 형태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시와 산문을 구분하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시를 산문의 대척점에 놓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것만도 아니다. 시를 산문의 반대편 층위의 어떤 것으로만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시와 산문이 같은 것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분명 산문적 감각과 리듬은 시적인 것과 확연한 차이점을 드러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전 시와 희곡이 하나의 몸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시 역시 그 어떤 산문적인 것들과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를 단지 산문의 반대 지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시를 정의하고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시라는 장르적 특성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시에 대한, 혹은 시를 정의하는 판단 근거는 시적 순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적 순간이야말로 모든 시적 이론 앞에 놓이는 것이며 시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시적 순간은 시적인 감각과 발상의 애초이면서 동시에 완성된 언어로서의 시적인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본질이다. 결국 모든 시쓰기에 대한 고민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 순간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만들어지는 구성 원리는 언어라는 기표를 통해 완성되지만, 시가 시작되는 근본적인 세계까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 이전에 이루어지는 시적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시인들은 언어로 형상화된 ‘시작품’ 이전에 시적인 것과 관련된 특별한 경험이나 감각, 사유 등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시가 시작되는 흥분과 열정의 뜨거움과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시가 시작되는 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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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언제나 자신만의 미적 인식을 드러낼 수 있는,
주관적인 묘사와 진술을 통해 개성적인
시적 표현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시적 순간은 우리의 미의식을 자극하는 그 어떤 감각이며, 미의식을 감각하게 하는 시적 사유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시인이 파악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것은 결과물로 제시되는 언어나 미적 표현으로서 기능하는 단순한 언어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로 이루어진 시적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언어를 넘어서고자 한다. 따라서 시적 순간은 언어 이전의 시인의 감각으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다. 물론 시인은 미적 인식을 현현하게 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기를 언제나 희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미적 인식의 앞에 놓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시인들이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언어에 대해 예민한 촉을 세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품고 있는 언어에 대한 희망은 언어 자체에 대한 단순한 갈급 때문이 아닌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시인은 언제나 자신만의 미적 인식을 드러낼 수 있는, 주관적인 묘사와 진술을 통해 개성적인 시적 표현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시인들이 꿈꾸는 것이 언어에 대한 단편적인 갈망이 아님은 분명하다. 시인은 시의 감각이 재현될 수 있는 그 어떤 시적인 순간을 꿈꾸고 그 세계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시적 순간은 바로 그와 같은 감각이 시작되는 순간 탄생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언제나 미적 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때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언어 자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때때로 시적 순간에 앞서 언어라는 기표가 제시되고 언급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언어가 시적 순간에 앞서 발현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적 순간은 이미 시인의 내면에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시인은 무의식적이거나 선험적으로 시적 순간을 파악하고 감각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시적 순간을 탐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각을 곧두세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탄생하는 시적 순간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경로와 감각을 통해 구체화되는가.
시적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정서와 감각을 지배하는 무엇인가와 만나게 된다.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 우리의 정서와 감각은 그야말로 예술적인 순간들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그런 충만함의 순간들로부터 시의 언어와 자리는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들과 만나기 이전의 삶과 사물은 의미화되거나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이다.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삶과 사물들이 우리의 정서와 감각을 지배하는 시적 순간과 만나게 될 때, 그것은 비로소 특별하게 재조직된 의미구조로 전이되기에 이른다. 시는 바로 이와 같은 조직화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드디어 온전한 미적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미적 가치를 부여받은 후에 재조직된 시적 순간을 우리는 ‘지배적인 정황’이라고 부른다.
지배적인 정황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지배적인 정황은 하나의 정황이 미적 인식이나 예술적 인식으로 전환되어 우리의 우리의 미적, 예술적 감각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배적인 정황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그것이 예술적인 경향과 감각을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지배적인 정황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은 미적 인식으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 되며, 따라서 그것은 시적 순간으로 온전히 기능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시적 순간은 바로 이와 같은 지배적 정황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지배적 정황을 통해 시는 비로소 시적인 순간과 만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적 순간은 지배적인 정서와 감각을 통해 표현되는 지배적인 정황에 다름 아닌 것이다. 지배적인 정황은 자신의 내부에 그 모든 시적 순간과 시적 감각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지배적인 정황은 드디어 시적 순간이 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의 미적 순간과 미의식의 첨예한 지점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배적인 정황이다. 그럼으로써 지배적인 정황은 우리의 미적, 예술적 의식을 끊임없이 지배하고자 한다.
자, 여기 하나의 사물이 있다. 그것은 생선일 수도 있고 통나무일 수도 있다. 여러분은 앞에 놓인 생선이나 통나무를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대상의 겉으로 드러난 장면만을 파악할 때, 그것은 좋은 시적 감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미적 순간은 생선이나 통나무의 표피적인 것만을 파악하고자 할 때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상이 지니고 있는 모든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적인 정서와 정황을 느낄 수 있도록 선택되고 재조직된 미적 순간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시적 대상을 파악하는 방법은 표면화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리하게 절단된 단면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한다. 지배적인 정황은 너저분하게 모여있는 것들을 바라볼 때 드러나지 않는다. 지배적인 정황은 여러 정황들 중에서 특별하게 선택된 정황이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흡사 생선이나 통나무를 가른 후에 그 단면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느 지점이 가장 지배적일 수 있는 지를 파악한 이후에 그것의 숨겨진 모습까지 예리하게 관찰하는 것은 지배적 정황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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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적인 정황으로 더 적합한 것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지배적인 정황은 언제나 유동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지배적 정황으로 좀 더 적합한 정황이 있냐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배적인 정황이 강하게 드러나는 정황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가 주는 감각과 학교 앞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초등학생의 모습은 같은 감각을 제시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생각한 것처럼 학교 앞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먹는 장면보다는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가 훨씬 강한 지배적 정황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는 우리의 미적 인식을 파고들며 시적 순간이 되기에 이른다. 바로 이와 같은 감각이 지배적인 정황인 것이다. 이처럼 지배적인 정황이 더욱 도드라지게 내재된 장면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지배적인 정황은 특정한 어떤 것으로 확정된 장면이나 개념이 아니다. 지배적인 정황으로 더 적합한 것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지배적인 정황은 언제나 유동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또한 지배적인 정황은 매우 정교한 장치이기 때문에 단순히 비극적 장면을 그리는 것 따위만으로 시적 감각의 첨예한 지점을 표현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지배적인 정황 역시 상징과 비유를 통해 시적 감각을 부여받거나, 삶에 대한 사유와 깊이를 통해 진정성을 부여받아야 함은 당연하다.
똑같은 장면일지라도 어느 경우에는 지배적 정황으로 기능하는 반면 어느 경우에는 지배적 정황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평범한 장면으로 전락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무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지점으로부터, 시가 탄생할 수 있는 감각을 이끌어내고 조직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아닌 그것들을 시적인 것으로 치환시켜야 한다. 바로 이러한 것. 이렇게 시적인 것으로 탄생되는 모든 것들에는 지배적인 정황이 제시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밥을 먹는 장면을 상상해보기로 하자. 밥을 먹는 행위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상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런 경우, 밥을 먹는 행위는 그 어떤 미적 인식도 느낄 수 없는 평범한 일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밥을 먹는 행위만이 남게 되기 때문에 미적 인식으로서의 지배적인 정황을 부여받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폭식증에 걸린 여자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관찰을 한다거나, 아니면 영화 「중경삼림」에서처럼 실연당한 남자가 유통기한을 넘긴 통조림을 먹는 장면을 부각시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런 경우에는 밥을 먹는 일상적 행위가 의미있는 지점으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먹는 행위는 단순히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넘어서서 욕망이나 결핍과 같은 시적 상징의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좋은 시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여러 조건을 충족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정황이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시적 행위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란 무엇인가를 논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하는 것 역시 지배적인 정황이라고 할 것이다. 시를 쓴다는 행위는 여러 의미와 가치를 내포한 것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언제나 미적 순간에 대한 탐구이며 미의식의 발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순간에 대한 탐구는 지배적인 정서와 지배적인 정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처절한 사투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자 시쓰기의 모든 것일 지도 모른다. 심지어 언어라는 기표의 아름다움과 표현력조차 지배적인 정황을 내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은 허망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더욱이 시가 현대의 영역으로 옮겨오게 된 이후에 지배적인 정황은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시는 이제 더 이상 시인의 내면을 직접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적 이미지는 더욱 정교하게 상징을 내재하고 있으며, 보다 복합적인 층위에서 시적인 것을 재현하려고 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시인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발화 방식을 취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단편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 현대의 시 속에 등장하는 정황이 시적 순간이 되기 위해서는 한층 더 정교하게 조직된 지배적인 정서와 감각이 필요하다. 시는 직설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이나 도식적인 이미지의 장이 아니다. 아울러 시적 순간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다. 시의 언어 이전에 지배적인 정황이 있으며, 시적 순간은 바로 이와 같은 지배적인 정황과 가장 강력하고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적인 정황이 선결되어야 시적 순간과 조우할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바로 그곳에 시인들의 자리는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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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범 경기도 안양 출생. 2002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