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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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희곡 복숭아 심지
복숭아 심지 이하정 1장. 시작 늦봄. 비의 엄마 소유의 과수원. 푸른빛의 나무들 아래로 비와 재. 비와 재, 나무에 매달린 과실을 수확하고 있다. 재의 핸드폰에서 뉴스 소리 작게 흘러나온다. 재 그 뉴스 들었어? 비 어? 재 뉴스. 여자들 말이야. 비 뭐? 재 온몸에 멍이 든 채로 죽은 여자들. 계속 발견되고 있잖아. 비 아··· 재 너도 들었지? 비 뭐··· TV 넘기다가 본 것 같네. 재 그거 병 때문이래. 알아? 비 ······ 재 무슨 벌레가 있대. 기생충 같은 거. 근데 그게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냄새를 맡는대. 벌레가 아픈 사람 몸을 찾아서 들어가는데, 그러면 그 사람 몸이 꼭 벌레 먹은 과일처럼 상하고 짓무르게 된대. 보이지? 딱 이 썩은 과일들처럼 되는 거야. 근데 꼭 멍 든 것처럼 보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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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돌밭
돌밭 박성우 돌밭 윗머리에 집을 앉혔다 땅이 풀리자 지붕이 기울어 겨울이 나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경칩 전에 산개구리가 나와 가을에 심지 못한 차(茶)씨를 세 알씩 묻었다 산수유나무와 매화나무를 얻어 괭이가 먼저 돌밭에 뜨건 꽃을 피웠다 도랑에서 길어 나른 물은 돌밭을 돌돌돌, 도로 도랑으로 갔다 토방에 곡식 한줌씩 놓아 산새소리 욕심내는 일을 그만 두었다 차(茶)씨 움틀 날 아득했지만 아내는 자꾸 신 것이 먹고 싶다고 했다 산수유 홍매 피어 돌밭에 오래 머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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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북한강
북한강 정영주 누구에게 이렇게 막막히 들어간 적이 있을까 내 안에 나와 한번도 합일되지 못한 강 그 속을 들여다보니 깊이 고랑이 패여 있다 고독한 저 곡괭이 자국 누가 흐르는 땅에 곡진한 씨앗을 심으려 했을까 한번도 심지 깊은 눈길 주지 못한 스스로 강이 되어 비껴간 시간들만 물 속에 주름 접혀 있다 물길 깊은 강 금기의 깡통 속에서 종을 쳐대던 바람이 강물의 표피만 긁고 간다 강물에서 이명소리가 난다 그도 귀앓이를 하는 모양이다 속 깊은 아픔을 바람도 건드리지 못 한다 제 몸을 끊임없이 갈아엎어 논 물 속의 토지에 내가 버린 발바닥이 꾹꾹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