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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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늦은 고백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늦은 고백 오성인 문득, 잊고 있던 너의 체취 난다 공기와 공기가 서로 입 맞추며 부푸는 정원 그 속에서 늘 어긋났던 우리 채 여운이 가시지 않은 호흡의 흔적을 따라 무작정 걷다가 마침내 길의 끝에 닿아 숙명 같은 그림자가 투명해질 때쯤이면 엇갈렸던 시간들 한 폭의 구름으로 피어오를까 메마른 정원에 다시 비 내릴까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 몹시 아팠다 아픈 길에서 화석이 된 눈물들이 몸을 부딪치며 오랜 울음을 길게 울었다 흰 개미떼 같은 절망이 온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더는 달라붙을 절망도 없을 때 너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너는 내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울음 한없이 미안해지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묵은 고백들을 꺼내 다독인다 제때 불러 주지 못한 너의 이름이 발굴되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유물 같다 풀들이 발에 채일 때마다 지르는 초록의 비명에서 너의 체취 묻어난다 공기와 공기가 서로 입 맞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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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셀프 빨래방 외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셀프 빨래방 이영주 빨래를 걷고 개고 창문을 닫는 너의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다른 행성으로 건너가다가 미끄러진 꿈 새벽에는 미열에 시달리고 답답하고 외롭다는 너의 중얼거림이 멍청해서 세탁기를 돌립니다 금속성의 소리는 왜 이렇게 매혹적일까요 쇠냄새 나는 새벽 홀로 잠든 그림자를 만져 봅니다 흠뻑 젖어 있습니다 가짜 털은 너무 춥지 짐승을 잘 찢어야만 따뜻해진다니 우리 사이가 너무 내밀하면 죽음과 가까워져 이 새벽을 얼마나 더 침묵에 담가야 그 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빛의 파편이 흩어진 꿈 미끄러질 때마다 야행 짐승처럼 이가 자랍니다 멍청하게 외로워질 때면 킁킁대는 그림자 어느 과학자는 죽음이란 시간과 공간이 없는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낯선 행성에서 너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납작해져 있었다는 걸 이렇게 네가 버린 시간과 공간 안에서 꿀 같은 대화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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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석류 익는 시간
[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석류 익는 시간 장석남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니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보네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 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 보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핀 이 부러진 듯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 마당가의 석류나무, 지난봄과 여름의 가뭄에 겨우 목숨이 붙어 한 해를 넘겼다. 느지막이 잎들이 피었으나 간혹 기웃거려 보아도 꽃은 끝내 못 본 듯한데 가을 지나니 쭈그러진 석류가 하나 발치에 떨어져 있다. 어디 눈에 안 띄는 자리에 서자처럼 달렸던 모양이다. 주워 비 안 맞는 데 올려놓아 본다. 안쓰럽게 여긴 거라면 거짓이고 그저 무심한 손길이다. 하늘이 도와서 나무가 무성하던 해의 찬란한 석류꽃들은 실로 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