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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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가족
가족 이규리 지난 밤 비에 물이 불었나 보고 오라 하니 아이는 나무의 키를 보고 왔다 물에 비친 나무의 키가 더 커졌다고 수척한 물 위에 왜 나무의 키가 더 커 보이는지 그 아이 비오는 날 마당에 나가 화분에 물을 준다 우산 쓰고 물을 준다 아이의 말을 알아들은 화분의 꽃들은 그것이 약속이란 걸 안다 비가 왔으니 물이 불었을 거라는 건 어른의 말 비가 와도 화분에 물 줘야 하는 건 아이의 약속 그 아이 통통 뛰어다니며 현관문이나 창문을 죄다 연다 비가 자꾸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고 바깥에 젖고 있는 풍경들 자꾸 안으로만 들고픈데 안에 들고 나면 더 이상 그리움 아니니 젖는 마음은 밖에 두어야 하나 자라도 어른이 아닌 어른과 어려도 좀처럼 아이가 아닌 아이가 한 집에 산다 꽃 피고 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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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명작에서 괴작까지12] 설탕 코팅이 녹는 동안에
종종 그 안엔 아주 예민하고 사랑스러운 아이, 어렵게 아물었지만 이상하게 유쾌해진 상처, 좋은 어른과 나쁜 어른 그리고 나쁘면서 좋은 어른,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워서 계속 바라보게 되는 세계가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맛으로 기다리고 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옷 말고 그 조그만 머리에 든 세계관을 봐달라고 내가 대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렇다. 한때는 화려하고 우아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다가 이제는 비루해져버린 유럽의 호텔을 배경으로 로비 보이였던 호텔의 주인이 지나간 이야기를 들려준다. 20세기의 어떤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는 인물인 옛 지배인 구스타브가 연인이자 대부호였던 마담 D의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면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이 구스타브를 돕기 위해 로비 보이 제로는 종횡무진 활약하는데 위트 있는 대사와 그림 같은 영화 미술 덕에 스크린을 뚫고 들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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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 ― 임유영, 「헤테로포니」(『오믈렛』, 문학동네, 2023) 전문 임유영의 시집에는 종종 어른과 아이, 선생과 학생이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그들은 같은 곳으로 소풍을 가도 서로 다른 자리에 앉으며(「미래로부터」) 어른들은 슬픔과 마주한 아이가 풀어 놓은 ‘부드러운 마음’을 마냥 귀엽게만 여긴다(「부드러운 마음」, 50쪽). 이 시 역시 표면적으로는, 각자 서로 다른 시를 지향하는 “문예반 선생님”과 “소녀들”의 이질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