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햇볕 아래 2
햇볕 아래 2 엄원태 무덤 옆 풀밭 공터 귀퉁이에 이주노동자의 것인 듯한 여행가방 하나 버려져 있다 그 옆에 단정하게 놓인 낡은 구두 한 켤레는 주인이 마치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을 증명하듯 땡볕 아래 환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는 어쩌면 육체이탈* 중인지도 모르겠다 구름 속에 머리를 밀어넣자**, 신발만 남겨둔 채 온몸이 구름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구름마저 사라지고, 쨍쨍한 햇빛이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가? 생각하노라니, 문득 내가 전생 어느 별에선가 가방마저 버린 채, 신발마저 벗어놓은 채 허둥지둥 떠나왔던 것은 아닌가 싶다 호기심 많은 누가 열어보았는지 흐트러진 내의며 남방 몇 벌에, 햇살 낭자하다 삶의 흔적들이란, 이렇듯 치욕스럽다 햇볕 아래 드러난 내의며 구두 한 켤레는, 서럽다 * ‘유체이탈’에 빗대어 만든 조어 ** 박진형 시인의 시, 화가 홍창룡의 그림 제목
-
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허공이라는 것」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허공이라는 것 엄원태 화살나무 가지는 촘촘하다. 곤줄박이가 날렵하게 파고들어 꼬리를 까닥인다. 가지가 순간, 흔들렸던가. 수수꽃다리 가지는 성글다. 쇠박새가 무심한 몸짓으로 앉았다가 훌쩍 날아간다. 가지는 미동조차 없다. 곤줄박이 앉았던 자리보다 쇠박새 앉았던 자리가 더 말갛다. 조금 더 비어 있다. 비어 있던 가지였는데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야 더 말갛게, 헹궈 낸 듯 비워 낸 게 보인다. 새는 그렇게 저들의 자취를 허공에 남긴다. 생애(生涯)라는 건, 원래부터 비어 있는 단애(斷崖)를 비로소 마주하고, 온몸으로 통과해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새는 노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울지 않고, 다만 여문 부리를 깨물다 떠난 것으로 허공을 한 번 더 헹궈 낸 것이다. 세상 노래를 다 한 것이겠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햇볕 아래 1
햇볕 아래 1 엄원태 아파트 뒤편 공장들 지나 산길 초입에 이르면 벗어놓은 양말자락만 한 텃밭들 널려 있다 407호 저 꼬부랑 할마시, 혼자서 땡볕 아래 밭을 맨다 천식으로 끓는 주전자처럼 쌕쌕거리는 노파는 그냥 앉아 있기도 힘들 텐데, 수건 뒤집어쓰고 파꽃 너머 밭고랑에 웅크렸다 유월 중순 햇살은 무르익어 물컹, 손에 잡힐 듯 뜨끈하다 노파는 이태 전,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혼자된 며느리는 아파트 어귀에서 포장마차를 한다 장사는 그리 잘 안 되지만, 낮에 잠 자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아이 둘은 저희끼리만 붙어다닌다 노파는 위층 우리 집에 가끔씩 시든 푸성귀 가득한, 검은 비닐 봉다리를 갖다 준다 쌕쌕대며 계단을 올라와서 주고 간다 그야말로 아무런 이유는 없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그 호의를 조금 어색해하신다 저 땡볕 아래, 흰 수건 덮어 쓴 슬픔 하나, 달팽이처럼 꼬무락거린다 쌕쌕, 숨 쉬는 소리 예까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