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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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긴 여름」외 6편
긴 여름 박숙경 5병동 코드블루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고 발자국 소리는 분주해졌다 귓바퀴를 바깥으로 돌려놓지 않아도 사망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닿는다 살다가 목구멍에 걸린 게 어디 갈비찜뿐이던가 자식들로 보이는 몇이 차례로 불려 왔지만 책임과 의무만 가볍게 복도를 맴돌 뿐 곡(哭)은 열어 둔 문으로 드나드는 바람의 몫 ―별이 될 거야 누군가 바깥에 바람이 분다고 했고 바깥이 나를 궁금해할 때까지 나는 바깥을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는 순간 비 전선 확대라는 안전 안내문이 뜬다 오동나무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 소리 커질 때마다 고인 눈물이 말랐고 생뚱맞게도 착하게 살아왔던가에 대한 반성을 해 보지만 아직도 고열의 영역, 해열제와 항생제가 다시 투입되고 땀범벅의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닿는 미열의 영역, 개운하다 내 안의 나를 알지 못했던 나를 후회하는 밤 토막잠 사이사이로 뛰어드는 악몽과 쓸데없이 사소한 생각들이 소리 없이 자라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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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국경의 밤」 외 6편
국경의 밤* 권현지 아주 무더운 날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파트리샤가 커피 교실에서 받아온 생두는 석 달 만에 푸른 잎사귀를 피워냈습니다 전염병에 걸린 내가 자가 치료하는 동안 새싹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며칠 뒤에 발견한 나는 푸른 잎사귀의 수고스러움에 대하여, 뭉뚝해져 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격리를 마치고 오후엔 영화관에 갑니다 도착한 빈 화면에는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놀이공원, 곤돌라를 타고 회전하는 즐거운 웃음소리로 영화는 곧 시작을 알립니다 청년 조지가 밤새 키운 사육장의 말 닉은 테마파크 한편에 잠시, 증여되어 있습니다 얼른 데리러 오겠다며 말의 긴 콧등에 키스하며 떠나는 조지의 뒷모습 말뚝에 묶여 긴장된 말의 다리가 점점 팽팽해집니다 가지런히 곤두선 털들이 주인의 사랑을 증명합니다 화면 가득, 평화롭게 떠오르는 구름은 색색의 지붕 위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곧이어 이상기후가 시작될 것이라는 말의 곤두선 직감으로부터 조지는 지프의 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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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글틴 청소년문학캠프 참여후기]어떤 밤 여러분에게도
열일곱 혹은 열여덟의 여름, 나는 김유정문학관에 있었다. 폐교를 수리한 문화교실에 전국에서 모인 또래 아이들이 다글다글 엎드려 글을 쓰고 있었다. 청소년문학캠프의 마지막 밤이었고, 작은 백일장이 열렸다. 아마 그 전에는 캠프파이어도 했던 것 같다. 글을 마친 아이들은 어두운 운동장으로 나갔다. 별이 많았다. 정글짐이거나 시소거나 그네거나 그런 차가운 기둥들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그림자는 저마다의 자리에 오랫동안 고여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밥을 먹고 나서 백일장 시상식이 열렸다. 이번에 결혼 소식을 알려온 친구가 ‘장려’였나 ‘입선’이었나 그런 상을 탔다. 나는 입상하지 못했고, 똑같이 빈손이었던 친구와 얼마 뒤 서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대형 서점의 회전문 안에서였다. 우리는 ‘어? 어?’하면서 서로를 스쳐지나갔다. 열아홉의 겨울, 나는 수련원에서 진행된 또 다른 청소년문학캠프에 와 있었다. 감기가 심해 열에 들뜨고 약에 취한 채로 정해진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