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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연재에세이] 콘텐츠의 사회학⑥
콘텐츠의 사회학⑥ 장이지(시인) 나루토와 자기계발 언젠가 <우리 결혼했어요>(MBC)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걸 그룹 소녀시대의 한 멤버가 나와서 자신은 ‘자기계발서’류(類)의 책을 즐겨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무 살쯤 된 소녀가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다니 이것은 조금 가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이십대 젊은이들에게 자기계발서는 뜻밖에도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뜻밖인가 하면 자기계발서에는 별로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학자는 자기계발서는 인간을 성공한 부류와 실패한 부류로 나누는 이분법,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전적으로 개인적 자질에서 찾는다고 하는 원칙 등 두 가지 장르 규칙에 의해 떠받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자기계발서는 읽을 만큼 읽었다. 이젠 그 책을 덮고 한번 물어보자.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인지,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이었기 때문인지.”(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2013) 자기계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루토 질풍전」(테레비 도쿄, 2007~ )의 ‘나루토’를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진다. ‘나루토’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미호’를 내면에 봉인당한 채 살아간다. 게다가 ‘아카쓰키(?)’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테러리스트 집단이 ‘구미호’를 빼앗기 위해 그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돈다. 심지어는 ‘나루토’가 사는 마을을 침략해 ‘나루토’의 지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마구 죽이기도 한다. ‘아카쓰키’에 대적할 수 있는 ‘닌자’는 없다. ‘구미호’를 마음에 품고 사는 ‘나루토’를 제외하면, ‘아카쓰키’에 맞서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아카쓰키’에 대적하기 위해 ‘나루토’는 피 나는 수련을 거듭한다. 그 수련 과정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닌자’의 길은 그렇게 고독한 것인가. ‘나루토’를 보고 있으면 ‘88만 원 세대’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떠오른다. 그들 역시 ‘나루토’처럼 피 나는 수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피 나는 수련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취업 시장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에 매진하고 있다. 그들은 ‘꿈’을 위해 ‘청춘’을 희생하고 있다. 그러나 ‘나루토’는 딱히 수련을 ‘자기희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아이는 밝게 성장하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어딘가 점점 일그러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짜증나.”라든지 “꼰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역시 ‘나루토’ 같은 아이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짜증나.”라든지 “꼰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이 딱히 문제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단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다. 아이들을 그렇게 일그러뜨리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자기계발이 과연 나쁜가 하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오찬호는 우리 사회의 대학생들에게 자기계발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첫째, 그것은 전적으로 ‘취업’을 위한 활동으로 정의된다. 둘째, 그 결과가 보장되지 않음에도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저 ‘계속’ 해나가는 활동이다. 셋째, ‘자기계발에 열심이지 않은 게으른 자’와의 비교에서 자신의 현재에 대한 위안과 만족을 구한다는 특징이 있다. 오찬호의 분석에 따르면, 요즘 대학생들에게 ‘자기계발’이란 취미활동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며, 신체에 각인되어 어느 순간 무반성적으로 지속되고, 항상 타자와의 비교, 타자에 대한 멸시를 통해 그 지속의 동력을 얻는 활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자기계발이 나쁜가 하는 물음은 상당히 기만적인 문제제기 방식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타자와의 비교, 타자에 대한 멸시를 통해 자기계발의 동력을 만들어 가는 방식은 타자를 멍들게 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멍들게 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우려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저서에서 오찬호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이 된 사람보다 덜 노력한 사람들이 가는 자리로 인식하는 대학생들, 수능 성적에 의해 매겨진 대학 서열을 내면화하여 또래 젊은이들을 평가하는 대학생들, 심지어 같은 대학 안에서도 수능 성적에 따라 학과의 순위를 매기고 비인기 하위 학과 학생들을 멸시하는 대학생들 등 자기계발의 논리에 함몰되어 스스로 ‘괴물’이 된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정규직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이 ‘자기 책임의 논리’에 의해 교묘하게 은폐된다.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주제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나태로 비난당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괴물’의 논리는 사실 기업의 오너들이나 반길 법한 논리가 아닌가. ‘아프니까 청춘’이라든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든지 하는 위로 역시 기업의 오너들이나 좋아할 말들이다. 그러한 위로는 현재의 과도한 경쟁 구조를 온존시킬 뿐이다. 오찬호의 저서에서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오찬호는 이 자기계발의 논리가 거대한 세계 체제의 내부에서 중층적으로 결정된 대세로 보이게는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개인은 바꿀 수 없는 사회 구조의 문제라기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이 아닐까. 딱 들어맞는 대안이 그의 저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논리에 길들여진 ‘자기계발의 서사’가 사실은 지극히 반인권적이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회의야말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類)의 낯간지러운 위로의 말보다 훨씬 값진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 스테이지에선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세요! 『사회적 신체』(고단샤, 2009)에서 오기우에 치키(荻上チキ)는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신체의 변형’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닌텐도 게임 <슈퍼마리오>(1985) 등 서브컬처의 콘텐츠들을 예로 들면서 논의를 진행한다. 게임 서사에서는 흔히 각 스테이지마다 다른 환경, 가령 수중이라든지 공중이라든지 높은 절벽 등 커뮤니케이션의 지형에 따라, 혹은 대치하는 적(敵)에 따라, 그에 적합한 신체를 플레이어가 선택하여 ‘스마트하게’ 싸워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기우에 치키는 그러한 게임의 세계관을 현실 사회의 아날로지로서 이해한다. 오기우에 치키는 이 ‘신체의 변형’과 관련하여 ‘휴대전화’ 이야기를 한다. 오늘날은 휴대전화야말로 사람들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유효한 미디어로서 상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 갤럭시 노트3’와 ‘갤럭시 기어’를 떠올리면 그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삼성 제품이 아니더라도, 스마트폰은 유저의 사회적 신체를 변형시킨다. 스마트폰 유저들은 개인용 컴퓨터의 전원을 켜지 않고도 스마트폰 기기를 통해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다른 스마트폰 유저와 SNS로 대화할 수 있으며, CD 플레이어 없이도 최신 유행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지도 검색 앱을 설치하면 어디든 가고자 하는 곳까지의 길을 스마트폰을 통해 찾아볼 수도 있고, 생소한 어휘를 접했을 때 종이사전을 보는 대신 스마트폰 앱이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여 검색해 볼 수도 있다. 인상 깊은 광경을 곧바로 촬영할 수도 있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는 이 모든 작업을 별도의 기기를 가지고 따로 했어야 했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항상 휴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거의 신체의 일부처럼 여겨지고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초사이언’(도리야마 아키라(鳥山明), 『드래건볼』)이 부럽지 않다. 스마트폰의 기능은 인간의 사회적 신체를 그만큼 바꾸어 놓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을 거쳐, 인류는 드디어 스마트폰을 들고 들여다보는 존재로 ‘진화’한 것이다. 서울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무언가에 몰입해 있는 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무언가 여분의 시간이 모두 스마트폰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느낌이다. 과거에는 ‘전자시계’가 변신의 매개체로 자주 등장했다. ‘전대물(戰隊物)’에서는 어김없이 ‘전자시계’를 통해 본부와 교신하는 히어로들이 나왔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에게 ‘전자시계’가 필수 아이템이 된 적도 있었다. 요즘에는 그것이 스마트폰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스마트폰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변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한동안 대중문화계에서 대국민 오디션이 유행했지만, 거기서도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변신’과 관련된 주문이었음을 상기해 볼 만하다. “다음 무대에서는 달라진 모습을 보고 싶다!” <슈퍼스타K>(Mnet, 2009~ )의 심사위원들이 조자룡 헌 창 쓰듯이 하는 주문이 바로 그것이다. <서바이벌 오디션 K팝 스타>(SBS, 2011~ )의 심사위원들은 저마다 자기 회사에서 훈련을 받은 참가자들이 그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놀랍다는 듯이 자랑을 한다. “어떻게 한 거죠? 고음을 낼 때 소리가 단단해졌어요!” 이 ‘변신’과 관련된 주문이 항상 ‘경쟁’을 유도하는 자리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스마트’해져야 한다. 앞에서 다룬 자기계발의 서사는 항상 그 이면에 ‘변신’의 서사를 감추고 있다. 자기계발의 서사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변신’을 주문하는 사회의 목소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졌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완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체가 되어야 한다. 마치 ‘포켓몬’이나 ‘디지몬’처럼! 완전체를 향해 진화를 거듭하는 몬스터처럼 우리는 되어 가고 있다. ‘포켓몬’이나 ‘디지몬’은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정말 진화를 하고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다. 심지어 ‘서정’에도 ‘진화’라는 말을 쓰고, ‘문학’도 ‘진화’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에도 ‘진화’라는 말을 쓸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쓰면 정말로 ‘스마트’해지는 것일까. 모두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대중교통의 한 풍경을 보면, 거기에는 어떤 의제를 중심으로 함께 움직이는 ‘시민’은 없고, 시각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반응체’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다. 그것이 ‘진화’든 아니든, 혹은 스마트한 것이든 아니든,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변신을 요구하는 사회에 의해 우리는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를 괴물적인 것으로 왜곡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어쩌면 더 중요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 이것으로 여섯 달간의 연재가 끝납니다. 내용을 보완하여 가까운 시일 안에 단행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이 연재에 관심을 보여준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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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연재에세이]콘텐츠의 사회학⑤
콘텐츠의 사회학⑤ 장이지(시인) 신카이 마코토, 거의 시적인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에 대해 김동인은 ‘햄릿의 출현’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그것은 이른바 번민하는 근대적 자아의 출현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과 완전히 경우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신카이 마코토(新海誠)에 대해서도 ‘햄릿적인 것의 출현’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2000년대에 거둔 성과 중에서 그의 출현은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2010년대에 오면 그 의미도 상당히 퇴색해 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별의 목소리」(2002),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초속 5센티미터」(2007)로 이어진 그의 2000년대의 작품들은 분명히 기념비적인 작품들이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이질성이랄까 획기성에 대해 아즈마 히로키는 신카이 마코토, 만화가 니시지마 다이스케(西島大介)와 한 어느 좌담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 : 「별의 목소리」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동영상이 아니고 말을 바꾼 것뿐이지만, 정지화면이 가끔 움직이는 화집(畵集) 같다고 느꼈습니다. 한 장의 그림이 막대한 인적 자원으로 이어져 25분이 되었다고 하는 상품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킹게이너」와 「별의 목소리」에서 그림 한 장만 취해서 비교했을 때, 「별의 목소리」 쪽이 더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인터넷에서 “원래 애니메이션은 정지화면의 연속이다, 당치 않은 소리를 한다”든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겠지만,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별의 목소리」는 종래의 애니메이션보다 게임의 오프닝이나 매드 무비(MAD Movie)에 가깝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별의 목소리」 직후에 신카이 씨가 작업한 「Wind」의 오프닝을 보았습니다만, ‘「별의 목소리」라고 하는 건 이거였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소녀 게임은 요컨대 한 장의 그림에 텍스트와 음악을 넣은 전자적인 그림 연극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미소녀 게임의 오프닝은 거기에서 좋은 느낌의 그림을 뽑아내서 템포 좋게 짜맞춰 나간다고 하는 논리로 만들어집니다.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별의 목소리」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의 완성된 작품이 아니고, 오히려 거대한 미소녀 게임의 오프닝이나 그 예고편과 같은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나 설정이 그 가운데서 완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아즈마 히로키 편, 『콘텐츠의 사상』, 청토사, 2007) 이에 대해 같은 좌담에서 신카이 마코토도 대체로 수긍하고 있다. 애초에 그는 일본 팔콤(Falcom)에서 PC게임 「영웅전설 가가브 트릴로지」, 「YsⅡ eternal」 등 오프닝 무비를 제작한 경력이 있다. 그렇지만 「별의 목소리」는 ‘게임의 오프닝’이라든지 정지화면의 패닝(panning)으로 보인다든지 하는 기술적인 부분에서만 돋보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남녀 간의 연애 감정을 세계의 위기에 바로 연계시키는 세카이계 상상력의 서사적 매력이나 ‘휴대전화 메일’이라고 하는 미디어의 새로움을 시대적 아이콘으로 응결시킨 사회의식의 예리함이 곁들여져 있다. 그리고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 미디어로서 편지나 문자메시지, 이메일 따위가, 혹은 더욱 본질적으로는 언어 자체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주제도 만만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새삼 느낀 것이지만, 신카이 마코토에게는 미지의 것과의 조우에 대한 외경(畏敬)도 있다. 가령 평행 세계를 감지하고, 평행 세계의 문을 여는 장치로 활용하기 위해 ‘유니온’ ― 소비에트 연방을 염두에 둔 국명 ― 이 ‘에조’에 세운 탑에 주인공 ‘히로키’가 근접 비행하는 장면이 그렇다. 거기에 탑이 있었다. 나는 날고 있었다. 스틱을 왼쪽으로 눕혀 탑 주위를 선회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벨라실라가 탑 그늘에 들어가자 새카맣게 어두워진다. 그 대신 탑은 선명한 거울이 되어 하얀 구름과 하얀 벨라실라를 비추었다. 햇빛 아래로 나갔다. 탑은 새하얘진다. 콕핏 안에도 빛이 가득 차서 새하얘졌다. 내 의식도 하얗게 타오른다. 계속 선회했다. 탑 주위를 끊임없이 휘돈다. 천천히, 어둠. 거울. 이윽고 천천히 빛…… 그리고 어둠. 나선을 그리듯이 조금씩 올라갔다. 휘돌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계 고도까지 다다랐지만 탑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벨라실라는 상방 시야가 좋지 않아 기수를 세우곤 해서 위쪽이 잘 보이도록 손썼다. 탑의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멀리 멀리 이어지고 있었다. 가늘어지며 흐릿해져 이윽고 소실점이 되었다. 줄곧 이렇게 탑 주위를 맴돌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타쿠야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사유리에게도.(신카이 마코토 원작, 가노 아라타(狩野新),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Ⅱ』, 민용식 옮김, 대원씨아이, 2008) ‘에조’에 세워진 탑은 그것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와는 별개로 중학생인 ‘히로키’ 등에게는 동경의 대상이다. ‘히로키’와 ‘타쿠야’는 그들이 손수 만들고, ‘벨라실라’라고 명명한 비행기를 타고 국경 너머 적국에 세워진 탑을 향해 간다. 비행 경험이 없는 고등학생이 비행기를 몰아 적국으로 월경을 감행한다는 설정의 황당함을 문제 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사유리’는 왜 그 탑의 장치와 연동하여 특수한 기면증에 빠져 평행 세계의 꿈을 꾸는가 하는 정당한 질문도 사실 애니메이션의 감상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부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사유리’의 할아버지가 설계한 탑이라는 설정으로 납득한 채 서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탑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히로키’가 모는 ‘벨라실라’는 어느새 탑에 이르러 그 주변을 선회한다. 거기서 ‘히로키’는 ‘사유리’와 동조하여 그녀가 보는 평행 세계의 꿈을 보게 된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별의 목소리」에도 나온다. ‘타르시안’과 접촉한 ‘나가미네’는 ‘노보루’가 있는 지구의 환영을 본다. 목소리가 없는 ‘타르시안’은 그런 방식으로 지구인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지도 모른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타르시안’은 좀 볼품없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탑을 보고 이 디테일의 결여라고 할 만한 타르시안의 추상적인 외관과 어딘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일종의 ‘거울’로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담이지만, 「별의 목소리」의 노벨라이즈의 경우, 고단샤의 디자인(2005년 판)보다는 대원씨아이의 그것(2009년 한국어 판)이 신카이 마코토의 이 신비주의적 비전을 잘 살린 게 아닌가 싶다. 대원씨아이 판 『별의 목소리』의 표지는 약간 푸른빛을 띤 은색으로, 희미하게나마 보는 사람의 모습을 반영한다. 얼굴이 적나라하게 비치지 않아 아주 마음에 든다. 별것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대중성에 대해서는 또 다른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그에게는 정념에 직접 호소하는 무언가 ‘육체적인 것’이 있다. 배경음악을 깐 채 오 분 남짓이나 이어지는 그 특유의 엔딩에서 나는 처음에 그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그만의 고유성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언어의 정원」(2013)에 이르러서는 왠지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그 방식은 이제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심하게 말하면, 타성에 젖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목소리가 좋다. 자신이 만든 애니메이션에, 그것도 주인공 역의 성우로 참여한다는 것은 여간한 자신감이 아닐 것이다. 「별의 목소리」에서 그가 성우로서 속삭이듯 들려주는 내레이션은 관객들을 집중하게 한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사건의 경위를 들려준다. 그리고 사랑의 만료에 대해 담담하게 고백한다. 거의 시적이다. 그 음성은 무기질의 도시를 연상케 한다. 삶은 계속된다. 첫사랑의 ‘그녀’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우리는 날씨가 있는 세계에 그대로 남겨진다. 어떤 평행 세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그 자체로 평행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아주 많이 닮았지만 몇 군데인가는 다른 부분도 있다. 애니메이션이니까 당연하잖아,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허구라도 그 자신은 관객들이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센티미터」는 어떨까. 어느 대학에서 이 애니메이션으로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발표를 맡은 학생이 인터넷에 떠도는 담론을 참고하여 이 애니메이션의 설정을 문제 삼았다. 이 애니메이션에 묘사된 도쿄 전철의 티켓 발매기가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상당히 세세한 부분까지 살폈다는 느낌은 들지만, 이 문제 제기는 사실 타당하지 않다. 문제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 중간에는 하늘에 지구처럼 보이는 거대한 달이 떠 있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 장면이야말로 사실은 도쿄 전철의 티켓 발매기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초속 5센티미터」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시대의 연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를 그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밤하늘에 거대한 달이 뜨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평행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행 세계에서의 전철 티켓 발매기 모양이 이 세계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그 세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일본 국토가 분단된다. 혼슈는 일본이지만, 홋카이도는 유니온이라는 적성국에 편입되어 ‘에조’라고 불린다는 설정이다. 한반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분단되었다면 아마도 한반도의 상황은 다소 달랐으리라고 여겨진다. 분단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설정은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일찍이 일본의 법학자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는 세계대전의 결과로 일본이 분단될 수도 있었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어전회의는 8월 9일 밤이었다. 만약 그것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6일이었다면 소련은 참전의 기회를 잃었고 조선의 38도선 분할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반대로 8월 9일 밤의 회의에서 초토결전(焦土決戰) 강경론이 승리를 얻었다면 적군(赤軍)의 기갑부대는 조선으로 남하하고, 미군은 인명의 손상을 피해서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는 사이에 소련이 남사할린, 북해도 오쿠우(奧羽)까지 진출하여, 결국 일본은 미소에 의해 분단되었을 것이다. 실로 8월 9일 밤의 천황의 (항복) 결정은 일본을 이 운명에서 구한 대신 조선이 일본을 대신해서 둘로 분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증보판, 서해문집, 2008에서 재인용함.) 오다카 도모오의 지적이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세계 설정에 어떠한 참고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사에 있어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언제나 다소 허망함을 남긴다. 결과론적으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그러나 이 분단은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대전 이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목으로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진주했다. 38도선이 그어졌다. 우리나라는 패전국도 아닌데 분단되었다. 유럽에서는 패전국인 독일이 동서로 갈렸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이다. 미소 양군의 진주로 두 개의 정부가 구성되고 나중에는 전쟁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다음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휴전선이 만들어지고 분단이 고착화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가 왕조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선 왕조는 조금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내발적인 요인에 의해 국민국가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분단도, 군사독재도, 레드 콤플렉스도 이 땅에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에 매달리는 것은 앞서 밝힌 대로 허망한 이야기일 뿐이다. 어찌 됐든 우리는 일제의 침략에 의해 비정상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매우 부당하게 외세에 의해 분단국가의 가시밭길을 가게 되었다. 분단된 한반도의 주민들은 이 ‘분단’이라는 불행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은 이 점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과제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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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의 사회학④ 장이지(시인) C: 도시괴담과 소녀 니시오 이신(西尾維新)의 ‘모노가타리(物語)’ 연작(2006~ )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민담’처럼 읽힌다. 작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소설 형식에 미달하는 것을 실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거기에는 물론 순수문학과는 구분되는 라이트노벨의 태생적 특징과도 관련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자리에서 그러한 면을 깊이 살펴볼 여유는 없다. ‘모노가타리’ 연작을 ‘민담’처럼 읽을 수 있는 것은 일단 이 작품의 화자가 ‘이야기꾼’으로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근대소설의 플롯과는 상치되는 잡다한 만담이 개입되고 있으며, 게나 뱀, 원숭이, 달팽이 등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얽히는 민속학적 코드들이 전면에 내세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역시 ‘민담’은 농경사회의 소산으로 ‘상민(常民)’을 그 주요 담당 층으로 하는 데 대해, 니시오 이신의 ‘모노가타리’는 농경사회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소녀’들을 주요 배역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소녀’가 주요 배역이 된 것은 전적으로 라이트노벨의 주요 소비층이 십대 학생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단 하나의 ‘전적인’ 이유라고는 역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유명한 「여고괴담」 시리즈(1998~ )의 주인공들도 ‘소녀들’이다. 게다가 그녀들은 ‘괴담’에 쉽게 연루된다. 그녀들은 ‘분신사바’와 같은 어쩐지 기분 나쁜 주술에 빠져들곤 한다. 그녀들은 긴 복도에서 언젠가 학교에서 자살한 여고생의 영혼과 조우하고, 학교 안의 외진 장소에서 귀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연애나 성적 문제와 같은 고민들을 해결해 달라고 귀신에게 빌기도 한다. 도시괴담과 소녀들이 쉽게 얽히는 것은 소녀들의 감수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일상과 영계(靈界) 사이의 접경지대에 존재한다. 일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소녀들의 자부심이 될 수도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의 오컬트적인 요소도 그런 맥락에서 ‘여성적 감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거나 미래에 대한 예감이 잘 맞아떨어진다거나 하는 비합리주의적 요소는 여성을 남성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한다. 김애란의 단편 「벌레들」을 읽고 “아, 이것은 도시괴담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하면, 물론 상당히 지엽적인 부분을 물고 늘어진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그 단편을 읽고 문득 나는 도시괴담을 떠올렸다. 임신 뒤 행동의 제약 때문에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여성이 겪는 불안이 ‘벌레들’의 형상을 통해 나타난 것이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지극히 전형적인 도시괴담의 패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도시괴담은 현실과의 연결성이 희박해진 패쇄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시뮐라크르’라고 오쓰카 에이지는 말한다(「소녀만화가와 도시전설」, 『가상현실비평』, 1992년 12월호). 소녀들은 일상적이지 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들은 ‘학교’라는 폐역(閉域)에 들어감으로써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채 그 잃어버린 현실의 자리에 시뮐라크르로서의 괴담을 만들어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최근에 아이돌 스타들이 나와서 ‘녹음실 괴담’ 같은 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아이들의 세계도 또한 얼마나 지독한 폐역이라는 것일까 하는 착잡한 심정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또 마케팅의 차원에서 조작된 괴담인지도 모르지만, 스타들도 일상에서 벗어나 영계가 열리는 문 근처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단순히 소녀들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C: 여러분의 일상은 안녕들 하십니까 야마우치 야스노부(山內泰延)의 개그 만화 『남자고교생의 일상』(2010~2012)을 보다가 혼자 웃는 나를 발견한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남자고교생들의 일상은 매우 흔해서 딱히 콘텐츠로 만들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대표적인 근대 서사 양식인 소설은 서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을 다룬다. 일생에 있어 딱 한 번만 일어날 듯한 사건을 다룬다고 하는 것이 근대소설의 일반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남자고교생의 일상』은 근대 서사로서는 낙제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화에 무엇을 기대하는가라고 반문이 돌아올 것 같은 분위기지만, 만화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뭔가 당혹스럽다. ‘일상물’이라기보다는 트리비얼리즘도 정도가 있다는 식으로 빈정거려 주고 싶다. 소위 ‘일상물’로 불리는 서사가 일본에서는 ‘세카이계’ 이후에 각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야기의 소비자들이 허황된 이야기에 질린 나머지 지극히 ‘리얼’한 세계로 퇴피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부자연스럽다. ‘리얼’도 정도가 있다. 솔직히 ‘일상물의 유행’이라는 담론에 대해 나는 정치한 설명은 할 자신이 없다. ‘일상물’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별로 읽거나 보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고교생의 일상』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꽃보다 할배」나 「꽃보다 누나」(tvN, 2013)와 같은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도 ‘일상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무언가 게임적인 요소가 끼어 있기 마련인데, 최근의 흐름은 그런 장치마저도 최소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꽃보다 누나」의 경우, ‘여정(旅程)’만 있을 뿐 서사적 장치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보다도 여행 자체가 일상과는 다르다고 딴죽을 걸어 올 분들도 있지 않을까 싶다(어쩌면 그 말대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포맷이 그전의 예능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지극히 소소한 이야깃거리만 주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야마우치 야스노부의 만화도 「꽃보다 누나」도 지나치게 평화롭다. ‘판타지에서 리얼리즘으로’라고 하는 미학적 흐름에 있어서의 궤도 수정 같은 것이 아니라, 작금의 ‘일상물’은 어쩌면 ‘평화로운 일상’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판타지’는 세카이계의 몰락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평화로운 일상은 없다. 베이비붐 세대가 퇴직을 하고 유럽 여행을 간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여행지에서는 테러도 없고 금융위기도 없고 인종차별도 없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그것도 역시 실제의 일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의 일상은 대지진으로 훼손되어 버렸다. 원전(原電) 사고로 일상은 오염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선을 전후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종합편성 채널들은 대선과 국정원, 북한과 관련된 자극적인 ‘속보’들을 계속 내보낸다. 과잉 공급된 정보가 범람하고, 사람들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정보들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대선 공약이 보란 듯이 폐기된다. 수많은 철도 노동자들이 직위 해제 통보를 받는다. 모두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어떤 대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우정이나 신의가 사라진 세계에서 『남자고교생의 일상』은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다. 우리들의 일상은 안녕하지 않다. 《문장웹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