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420)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림자 위로 내리는 눈
그림자 위로 내리는 눈 강윤미 그림자도 피해가지 못했다 이십칠 년 전 밤에도 눈은 내렸단다 손전등을 비추면 금방 사라지는 추억의 힘으로 어머니는 겨울을 나곤 하셨단다 그녀의 생일이 되면 내 가랑이가 아프다 골목에 모여든 수많은 발자국 위로 다시 눈이 내린다 저마다 기억이 다른 발자국들, 납작 엎드린 등이 눈을 업는다 울음을 그친 눈은 나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폭설이다 발을 내밀면 꼭 그만큼의 그림자가 수북이 쌓인다 눈송이가 만들어내는 곁가지 사이로 허공이 휜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내 그림자 희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사랑에 빠진 고양이는 무대 위로 올라가 관객을 향해 외쳤다
사랑에 빠진 고양이는 무대 위로 올라가 관객을 향해 외쳤다 박연준 내 앞에서 날개를 손질하지 말아요 당신이 나를 등지고 날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이 밤이 나를 불안하게 해요 눈물이 뚝, 뚝, 볼 아래로 흐르다 죽어 버리고 그런데 눈물을 위한 제사 같은 건 없나요?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내 입술이 뭉그러졌기 때문이죠 (방백으로 : 울지 않아야 할 텐데……) 왜 이 밤 속에 우리가 없는 걸까요? 미안해요 정신 나간 계집의 피가 난무한 이 더러운 밤을 당신의 콧속으로 들이밀다니 나는 죄를 짓고, 벌을 받아요 너무 추워요 당신의 연애는 무슨 빛깔일까? 나를 꼭 꼭 숨겨주세요 끝장이 나기 전에요 소리 지르지 말아요, 내 발가락들은 신경이 예민해요 당신은 날 죽이지 않을 건가요?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생명의 언어 형식-이기인,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0년 명장면들 생명의 언어 형식 이기인,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 박수연 한 권의 시집은 무수한 생명을 거느린다. 이기인에게 이 말은 그러나 특별한 의미로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시인들의 시편들은, 그것이 자연의 풍경을 노래하거나 인공적 디자인의 기계적인 미를 묘사할 때, 대부분 의미심장한 생명을 환기하게 마련이다. 피어오르는 생명이거나 소멸되는 생명이 그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시적 주체의 언어 내용으로 그렇거나 그 주체가 고안하는 주제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시를 관통하는 시선에 포착된 대상적 사물들과 사건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시의 주체가 아니라 수사적 요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기인은 이 경우가 아니다. 이기인의 시집이 ‘무수한 생명을 거느린다’고 쓸 때, 이 말이 지시하는 것은 주제나 내용으로서의 생명 이전에 그 생명의 언어적 형식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