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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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생명의 언어 형식-이기인,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0년 명장면들 생명의 언어 형식 이기인,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 박수연 한 권의 시집은 무수한 생명을 거느린다. 이기인에게 이 말은 그러나 특별한 의미로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시인들의 시편들은, 그것이 자연의 풍경을 노래하거나 인공적 디자인의 기계적인 미를 묘사할 때, 대부분 의미심장한 생명을 환기하게 마련이다. 피어오르는 생명이거나 소멸되는 생명이 그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시적 주체의 언어 내용으로 그렇거나 그 주체가 고안하는 주제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시를 관통하는 시선에 포착된 대상적 사물들과 사건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시의 주체가 아니라 수사적 요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기인은 이 경우가 아니다. 이기인의 시집이 ‘무수한 생명을 거느린다’고 쓸 때, 이 말이 지시하는 것은 주제나 내용으로서의 생명 이전에 그 생명의 언어적 형식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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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육질의 ‘시선’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시
이기인 1967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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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지퍼가 내려갔다
지퍼가 내려갔다 이기인 붉은 단추가 떨어진 자리에 금속 지퍼를 달았다 지금껏 입어온 옷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이라, 소녀는 거울 앞에 섰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던 지퍼의 상상력은 고단한 천당에서 지옥으로 내려왔다 봉긋한 가슴이 좌우로 절개되어 지퍼 밖으로 나왔다 합판으로 이어진 벽의 안쪽에서 합판을 뜯어내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찢어지게 아픈 그것은 지금의 노동처럼 참을 수 있는 통증이었다 오랫동안 비명을 참은 석류는 데굴데굴, 아껴 쓴 화장품과 그렇지 않은 화장품 속에서 혼자 늙어버렸다 석류나무에서 쿵! 떨어진 죄는 쪼글쪼글 육체를 졸이며 살아왔다 차라리 창녀처럼 오그라든 너는, 공처럼 날아가서 상처를 남기고 싶다 합판으로 이어진 벽의 안쪽에서 누가, 울고 있다 작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녀의 지퍼는 지옥에서 천당으로 다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