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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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숲그림자
빛이 들지 않는 나무를 향해 발을 내디뎠을 때, 누군가 빠르고 가볍게 이선 앞을 스쳐 지나갔다. 헉. 이선은 소리를 토해 냈다. 칠흑 같은 검은색은 아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맸다. 길고 마른 몸은 입체적이진 않아도 납작하지도 않았다. 이선이 입을 벌린 채 어리둥절한 사이, 까만 존재는 부드럽고 우아한 몸놀림으로, 땅 위에 살짝 떠 허공을 걷는듯한 걸음걸이로 사라져 버렸다. 이선은 뒤따라오는 윤식에게 소리쳤다. “아버지, 봤어요?” 윤식이 다가왔다. 이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빽빽한 숲의 어둠이 그늘져 있을 뿐이었다. 윤식은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우리의 새집에서 쉬자꾸나.” 이선은 윤식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새집이라니. 어느새 윤식은 왔던 길로 성큼성큼 되돌아가고 있었다. 차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잠에서 깬 일선과 명신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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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나의 미술유람기⑤] 백년호도주를 마시며
그 공직 생활이 평탄치 않았고 그 말년이 쓸쓸하고 궁핍하여 양주팔괴의 한 분인 이선()의 도움으로 그림을 팔며 연명하였다 하니, 그 극빈을 위하여 다시 한 잔을 안 들이켤 수 없다. 판교 선생은 낯선 자리 내 말만 듣겠다는 눈짓이나 나는 기어이 한 잔 그득히 술을 따르고 도리어 묵묵히 앉아만 있다. 그 적막 곁에 선생이 쳤던 대나무들이 그림 밖으로 슬글 슬금 걸어 나와 병풍처럼 둘러 수런거리며 어울려 보는 시늉이니 이 또한 내 어령칙한 술기운이 만든 작화(作話)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당신이 어느 현명한 바보의 은둔과 그 은자의 그윽한 삶을 엿보았던 글귀를 다시 이 백년호도주의 투명한 속처럼 불러 보는 것이다. 聰明難,糊塗難,由聰明轉入糊塗更難. 放一着,退一步,當下心, 安非圖後來福報也 (총명하기가 어렵지만 바보스럽기도 어렵다. 총명함을 거쳐 바보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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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중편연재] 겹 (1회)
그러니까, 이선 호크와 줄리 델피의 여덟 번째 영화를 너와 함께 본 날 밤. 부고가 온 건 밤 열 시가 다 돼서였어. TV에서 수목드라마가 막 시작됐을 때, 그때 수신음이 울리더라.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발인 날짜, 장소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어. 처음 보는 번호였지. 아마도 너의 가족 중 누군가였거나 가까운 지인이었겠지. 처음 든 생각은 분하다는 거였어. 하루 종일 괜찮았는데. 저녁도 그만하면 맛있었고 영화도 그럭저럭 좋았는데. 왜 그런 하루의 끝에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 걸까. 그래, 짐작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네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 오래 전 어느 날 내게 물은 거 기억나?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 마치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묻는 것처럼 심상하게 너는 물었어. 혹시 어디선가 네가 죽은 적이 있느냐고. 가끔 생각해. 대혼돈이 일어나기 전, 우주가 이런 형태가 아니었던 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