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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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검은 말들의 시간
검은 말들의 시간 이설야 하늘 위로 유령해파리들이 날아다니는 밤이 오고 있어 여자가 숨을 내쉬자 입속에서 긴 호스가 나왔다 나는 호스를 잡고 그 끝을 틀어막고 있었다 등 뒤에서 그림자들도 호스를 같이 붙잡고 있었다 여자가 뱉은 검은 말들이 내 옷에 튀었다 털어도 털어지지 않는 말들 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자의 말들이 유령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내 귓속을 맴돌았다 유령해파리들이 하늘을 버리고 바다로 서둘러 돌아가고 있어 내 입속에서도 긴 호스가 나왔다 걷잡을 수 없는 말들 여자의 옷에 내 검은 말들이 튀었다 여자와 나는 얼굴에 재를 묻히고 각자 구덩이를 팠다 검은 말들이 묻은 옷들을 재빨리 파묻었다 돌처럼 차갑게 식은 심장들 내 등 뒤에서 그림자들이 서로의 벼랑을 물어뜯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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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깃털 하나
깃털 하나 이설야 장마 지나 물비린내 나는 골목에서 만났지 배를 훤히 드러낸 채 길을 건너던 그녀 울퉁불퉁하고 커다란 배 위에 선명한 바늘 자국 슬픔이 돌기처럼 돌고 있었지 커다란 파도가 갈라놓은 것들 배꼽이 떨어지기 전 그녀가 잡고 있던 것들 식은 손, 부서진 빛의 무리 아이를 낳았다고! 소리치는 배 살점이 뜯긴 고래처럼 물속 같은 거리를 떠다니고 있었지 소용돌이치는 물결이 그녀를 끌고 다녔어 모두 물고기처럼 벌겋게 뜬눈으로 건물 벽에 바짝 붙어서 그녀와 함께 거센 물살에 휩쓸렸지 태양이 쫓아오고 있었어 나도 함께 허우적거리며 헤엄쳤지 복어처럼 배가 부풀어 올랐어 저녁이 되자 죽은 태양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새떼가 날아올랐지 깃털 하나가 천천히 내려오다 사라진 늦은 여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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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증상들
증상들 이설야 공중은 한숨을 걸어 놓기 좋은 장소 한숨이 떠다닌다 한 숨이, 한 숨에게 전염된다 거리는 정지된 화면, 거대한 공터 엘리베이터는 지상 어딘가에서 멈췄고 검은 연기를 내뿜던 굴뚝들은 오던 봄을 돌려보냈다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날짜들 세상이 뒤집혔다 공포의 숙주는 생활이라는 불안 불안이 절벽 위에서 지는 해를 소독한다 슬픔을 거래한 자들 아픈 몸들을 인질 삼아 없는 평화를 복제했지 배가 터지도록 무한증식했지 물고기들의 머리를 둘로 만든 지구의 너무 많은 신들 들끓는 지구를 휘휘 저어서 곤죽이 되도록 휘휘 저어서 새로운 지구를 만들었지 서로 등만 바라보는 마스크족을 탄생시켰지 무인상점 앞에 선 한숨이 한 숨, 또 한 숨을 건너가고 있다 넘칠 만큼 넘친 지구는 지금 자가격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