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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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텅 빈 항아리의 시간
텅 빈 항아리의 시간 이숙경 내가 집을 떠난 건 5월이다. 생의 지도에 방향지시등이 꺼지고 엉망으로 헝클어진 털실 뭉치처럼 길이 보이지 않게 된 어느 지점에서 나는 손을 들었다. 포기가 좀 더 빨랐거나 늦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파산을 신청하고 제발 파산이 승인되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던 비극적 간절함은 오히려 낭만적이었다. ‘모양이 별로 좋지 않은’무엇인가가 내 몸 어디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의사 앞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을 수 없었다. 하필 파산이 승인된 날이었고, 불화의 끝을 보던 가족과 화해했던 날이었고 하필 화창한 봄날이었다. 흐드러진 넝쿨 장미 몇 송이를 꺾어 들었다. 작고 단단한 가시에 찔렸지만 아프지 않았다. 핏방울이 듣는 손끝을 보며 고통의 감각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 ‘삭제’ 키였다. 그 무엇보다 내가 나를 지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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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마지막 깃털」외 1편
마지막 깃털 이숙경 어젯밤은 힘들었다. 난데없는 불면의 밤이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다가 눈을 감았다. 그 책의 갈피는 어찌나 무겁던지 넘길 수 없었다. 나는 작가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덕분에 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덕분에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격정과 사무침과 흐느낌을 안겨주었는지 아느냐고. 부러움과 질투심이 가득 차 책은 덮을 수 없고 글은 심장에서만 펄떡거렸다. 검색과 삭제와 텍스트를 잇는 작업이 부질없어 보이는 날이었다. 오늘 나는 왜 이리 추울까. 자리에 누워서도 춥고 고통스럽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무슨 고통? 내가 생각하던 고통은 실연과 무지와 회환과 처절한 예술혼을 포함하여 양장본 갈피에서나 만날 수 있는 문어적 수사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살갗이나 관절이나 가슴 어디쯤에서 통증을 느낀다기보다는 의식 속에 끼어 있는 멋부림이 아니었는지. 잠이 오지 않으니 오히려 사물이 소리 지르며 달려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