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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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유리종이
유리종이 이윤훈 마린블루 비단벨벳 표지를 열고 물끄러미 저 너머의 세계를 보던 여자 설렘을 봉한 자목련 주둥이와 피를 뿜는 샐비어 상처와 흉측한 늙은 밤나무 검은 망사와 허공에 찍힌 지빠귀 발자국과 너무 극명해! 두려워! 하지만 자꾸 유리종이에 끌리어 마린블루 비단벨벳 표지를 열고 물끄러미 저 너머의 세계를 보던 여자 안개가 밀려오면 양모이불을 덮은 듯 포근히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은 유리종이를 읽던 여자 정오의 정수리에 앉아 마린블루 비단벨벳 표지를 열고 한없이 저 너머의 세계를 보다 마침내 태양을 끌어안으려 뛰어든 여자 찢긴 유리종이 한가운데 피 흘리며 헐떡이는 아름다운 야생의 표범 마린블루 비단벨벳 표지를 열고 물끄러미 저 너머의 세계를 보는 내게 속삭인다 아무도 껴안을 수 없어 유리종이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선 유리종이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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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만토바의 연인」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조] 만토바의 연인 이윤훈 발끝 아래까지 눈꺼풀 내린 무덤 하룻밤 잠을 자듯 눈 한 번 감은 연인 흰 옥빛 상형문자로 오천 년이 흘렀다 죽어서도 껴안은 채 별의 꿈을 꾸는 여기는 달도 잠든 그들만의 궁전 사랑해, 불꽃 같은 말 어둠의 눈을 켠다 은하 너머 수만 년 더 빛나야 한다고 사랑의 별자리에서 두 눈을 반짝인다 그들을 해독한 아침 죽음조차 환하다 *만토바의 연인: 셰익스피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 배경인 만토바에서 서로 껴안은 채 발견된 오천 년 전의 무덤 속 연인 굽은 못을 위한 레퀴엠 한여름 중천에 뜬 태양처럼 직시하라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거다 기둥에 대못을 치며 단호하게 외쳤다 미송 속 도사린 옹이를 만났을까 여린 속을 보고 그만, 눈 질끈 감았을까 못 하나 맥을 못 추고 휘어지고 말았다 등 굽은 그림자로 서성이던 아버지 세상의 벽을 끝내 꿰뚫지 못하셨지 조심히 굽은 못을 펴 연장통에 넣었다 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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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연못이 내게
연못이 내게 이윤훈 내가 골똘히 내 안을 들여다보는 사이 그대는 얼마 동안이나 내 곁에 와 있었던 거죠 퍽 오랜 듯 굶어 무척 야위어 보이는군요 연잎만큼 커진 귀에 먼 뻐꾸기 소리 담기고 여물어가는 연실 같은 눈망울 이제 막 닫고 제빛을 접어 고요 속으로 들려하는군요 부레옥잠의 독 오른 오기로 나를 맑히고 투명한 고요를 들여다보다 난 얼마나 놀랐던지 내 품의 것들을 살뜰히 키운 건 바동대며 떠돌다 가라앉은 찌꺼기들이었어요 가슴에 낀 두 개의 하프 끊어질 듯 줄을 당겨 소리의 목을 옥죄고 한때의 나처럼 갈증의 밑바닥까지 다다르려는 건가요 끝내 단말마를 만나려는 건가요 바짝 마른 바닥 엉그름 그물에 걸린 것은 온통 죽은 것들뿐이었어요 그대의 밑바닥에 갇힌 목마른 비단잉어 마지막 아주 닫혀버릴 듯한 쪽문 같은 아가미 그만 샘 줄기를 끌어와 그대 몸속으로 밀어 넣어요 마침맞게 하프의 줄을 풀고 비단잉어의 숨통을 열어주어요 눈망울을 열어 다시 수련을 피워요 제빛을 담뿍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