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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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정오
정오 이현승 머리통이 익을 것처럼 볕을 내리 쬐는 태양 아래서는 모든 것들이 골똘하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생각을 낳아서 담쟁이 저리 뻗어나가고 뻗치고 뻗쳐서 멎은 자리 담쟁이는 담쟁이를 지우고 생각이 생각을 지워서 만상이 저리 골똘하다. 만상이 한 점 골똘하다. 만상의 자리에서 올려다보면 세상을 태울 듯 불볕을 내리 쬐는 태양도 한 점 골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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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채널 디스커버리
채널 디스커버리 이현승 오징어들은 갓 쓰고 도포를 두른 뒤 일찌감치 속세를 떠나 심해로 들어섰어요 묵경(墨境)에 들었다고나 할까요 너무 추운 밤이군요 새우처럼 잔뜩 웅크려 있어요 춥고 어두운 곳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단지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잠을 자는, 배고프고 외로운 오징어들이 어두운 심해를 떠다니고 있어요 고래 입으로 자진해서 들어간 크릴새우들처럼 고작해야 먹히기밖에 더하겠어요? 이곳에선 모두 다 든든한 친구이지요 너무 외롭고 고요하다면 고래뱃속이라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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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괜찮은 생각
괜찮은 생각 이현승 꽉 무세요 아프세요? 지혈 솜을 이 뺀 자리에 물릴 때 내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솜이 빠질까봐가 아니라 의사의 코가 너무 가까워서다 때리면서 아프냐고 묻던 고참병이 고마운 건 대답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아프다도 아니고 안 아프다도 아닌 괜찮습니다 도대체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들이란 뭐지? 아랫니와 윗잇몸 사이에 솜을 물고서 환자 대기실에서 엿들은 누군가의 말 사회생활학과는 뭐하는 데야? 사회생활이 어렵지 수족관 속 열대어의 툭 튀어나온 입에서 공기방울이 쪼로록 올라갔다 뭐라고? 무표정한 것은 열대어 아무래도 수족관은 병원과 너무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