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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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담
담 임경섭 마카는 하늘을 날아다니기 시작했어 발기부전, 불임, 갱년기 장애를 품고 마카가 도심 한복판을 떠돈다는 사실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야 잃어버린 남성의 힘을 되찾아 준다는 마카는 전파이거든 전단지로나 끼여 오던 것이 이제는 날개를 달고 공중을 배회하거든 나는 떠들썩한 적막들을 데리고 레인보우 모텔 너머로 날아갈 거야 우리의 음절이 허공을 발음하기 시작했거든 모두가 지닌 유리창마다 하루살이처럼 덕지덕지 유언들이 달라붙기 시작했거든 그리하여 지친 무지개는 간판처럼 빛나야 했거든 고귀한 성조들은 뭉텅이로 날아다니기 시작했어 인쇄되지 못한 노래는 역사가 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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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눈썹바위
눈썹바위 임경섭 형은 계단을 올랐다 형은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형은 계단을 오르고 싶지 않은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해넘이가 시작된 주홍빛 하늘을 등지고 형은 계단을 올랐다 형이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서는 만큼 해는 빠르게 수평선 쪽으로 가라앉고 있었지만 형은 수평선을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계속 올랐다 바다를 물결을 물비늘을 움직이는 수평선을 해넘이를 해를 해의 움직임을 시간을 경계를 공간을 텅 빈 공간의 소리를 허공과 공허의 구분을 돌아다보는 건 나였다 형은 계단을 올랐다 형은 제 등짝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고 싶지 않은 나를 기어코 이끌고 형은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서 또 다른 계단이 시작된다는 걸 형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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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페달이 돌아간다 2
페달이 돌아간다 2 임경섭 단지 옆 수변 공원으론 새 한 마리 울고 있지 않은 어둑한 겨울이었습니다 공원을 따라 반듯하게 포장된 자전거도로 옆으로 아파트 단지의 창들은 빠짐없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장갑도 끼지 않은 형은 움켜쥔 주먹들을 연신 퍼런 입술로 번갈아가며 불어대면서도 페달 밟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새로 산 기념으로 머리를 새로 한 형은 미용실에서 나와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고 있었습니다 형이 힘주어 페달을 밟을 때마다 배경은 빠르게 형을 지나쳐 갔습니다 가도 가도 형과 형의 자전거를 둘러싼 배경은 반듯한 아파트 불빛이었습니다 반복되는 배경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아파트 불빛을 바라보며 자신이 제자리에 멈춰 있는 건 아닐까 형은 생각하며 페달질을 잠시 멈추어 보았지만 자전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형은 멈추었지만 배경은 형과 형의 새로 산 자전거를 멈추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형이 동네에서 배달 노동을 하겠다며 자전거를 사온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