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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연속 공개인터뷰 나는 왜 : 자선 단편소설]아무도 아닌, 명실
[연속 공개인터뷰 나는 왜 : 자선 단편소설] ● 황정은 작가의 자선 단편소설 아무도 아닌, 명실 황정은 그리고 그녀는 노트가 한 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이었을 것이다. 오후 어느 때 그녀는 잘 사용하지 않는 찬장을 열었고 무슨 생각으로 그걸 열었는지 잊은 채로 어둑한 선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놓인 자리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찻잔들엔 파란색과 녹색으로 데이지 무늬가 있었고 테두리의 금빛은 약간 바래 있었다. 그녀는 그중에서 가장 아껴 가며 사용했으나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찻잔을 알아보았다. 아마도 그 순간쯤이었을 것이다. 노트가 한 권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실리의 노트가 이 집 안 어딘가에 몇 권쯤 남아 있을 테니까. 그녀는 다른 찻잔들보다 깊숙하게 놓인 찻잔을 보았고 받침 모서리를 잡아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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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인터뷰_나는 왜/자선 단편소설] 굿바이 윤이형 오늘이 그날이 될 수도 있다. 천사가 내려와 나를 침묵하게 하는 날. 내 모든 지혜가 끝나버리고, 모든 걸 잊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고 마는 날. 눈을 뜰 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눈을 도로 감는다. 요즘 들어 차갑고 딱딱한 예감에 잠을 깨는 날이 부쩍 늘었다. 기회가 수없이 많았는데도 당신은 나를 없애지 않고 살려 두었다. 왜일까. 나는 딸꾹질을 하며 생각해 본다. 당신은 내가 모든 것을 안다는 걸 모른다. 당신을 렌즈처럼 이용해 세상을 보고 있다는 걸 모른다. 나의, 그리고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속속들이 꿰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토록 모르는 것이 가능할까. 그 까만 무지에서 당신의 희망이 자라난다. 희망은 좋은 것일까. 나는 아주 천천히 숨을 쉬어 본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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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공개 인터뷰 나는 왜:4회_이재웅 자선 단편소설]전태일동상
[연속 공개 인터뷰 나는 왜 - 이재웅 소설가 자선 단편] 전태일 동상 이재웅 대학 시절 김태광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조소학과 학생이었다. 체격은 우람했고, 험궂은 얼굴에, 과묵했고, 약간 곱슬진 머리를 목덜미가 덮이도록 기르고 다녔다. 그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인상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곤 했다. 하지만 실제의 그는 무척 순박했다. 그는 기쁘거나 즐거울 때는 큰 입을 벌려, 덥수룩한 수염 사이에서 치아의 흰 이미지가 가득 차서 얼굴 전체로 피어오르도록 웃곤 했는데, 그렇게 웃는 와중에도 앞머리에 덮인 두 눈에는 어떤 부끄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가 과묵한 것은, 위엄을 내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내성적인 성격이며 보통 사람들보다 언어를 선택하거나 또 어떤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둔감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조소학과의 졸업 워크숍을 일주일쯤 남겨 두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