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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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별미
별미 하종오 중년여자는 들길에서 앉은걸음 걸으며 쑥을 캐고 냉이를 캔다 쑥으론 국을 끓이고 냉이론 찬으로 무쳐서 쌀밥까지 먹을 작정한다 북조선에 있었을 적엔 배가 고파 뜯어먹으려고 나가면 들에 남아 있지 않던 봄나물이 한국엔 지천에 널려 있어 중년여자는 마음이 푸근해진다 북조선에선 끼니로 삼던 봄나물이 한국에선 별미로 상에 차려진다는 걸 알고 이웃들에게 나눠주려고 중년여자는 쑥과 냉이를 여러 비닐봉지에 조금씩 담아 쇼핑백에 넣어 들고 총총걸음 걸어 동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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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시급(時給)
시급(時給) 하종오 북한 출신 여자는 황사바람이 싫다 빌딩 가서 계단 청소해 놓아도 가정집 가서 빨래 빨아 놓아도 식당 가서 그릇 씻어 놓아도 금세 황사가 내려앉는다 북한 출신 여자는 황사바람 부는 날이면 그런 허드렛일 하면서도 집 생각에 북쪽 바라본다 여자가 북한 도망쳐 나왔던 그해에도 황사바람 속으로 부모형제는 먹을거리 찾아 산으로 들로 흩어졌는데 올해는 다 모여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릇도 씻을까 마을 뒷산에는 산뽕나무도 잣나무도 심겼을까 마을 앞들에는 논고랑도 밭고랑도 쟁기질 되었을까 시간이 돈이라는 걸 남한에 와서 안 북한 출신 여자는 이내 잡생각을 접고 다음 일할 곳으로 가려고 황사바람 속으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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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CCTV
CCTV 하종오 여자는 지하 주차장에 진입하는 순간 서행한다 주차장무인감시카메라가 그녀의 승용차를 전송한다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꼼짝 않는다 엘리베이터무인감시카메라가 그녀의 표정을 전송한다 여자는 복도에 내리는 순간 바로 걷는다 복도무인감시카메라가 그녀의 걸음걸이를 전송한다 여자는 도어를 여는 순간 인사한다 도어무인감시카메라가 그녀의 손을 전송한다 여자는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컴퓨터를 켠다 사무실무인감시카메라가 그녀의 가슴을 전송한다 여자는 휴게실에 가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신다 휴게실무인감시카메라가 그녀의 지갑을 전송한다 여자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순간까지 살풋 웃는다 (화장실에도 무인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다고 믿는다) 이 시각 비디오테이프에 완벽하게 담기고 회사가 출근 점검과 근무평가를 한다 해도 혹 아는 누군가가 어디선가 살해된다 해도 여자는 알리바이가 완벽하므로 안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