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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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2)
현아 입에서 ‘오빠’라는 소리가 자연스레 두 번씩이나 나왔다. 그 말을 듣자 마른침이 목을 넘어갔다. 아, 그런데, 나는 무엇이, 아니 누가 20년 동안 갇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공책을 다시 현아 쪽으로 슬며시 내밀었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둔 뒤엔 처음으로 이는 어지럼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이건 현아 아니면 누구에게도 소용없는 시야. 여기 들어 있는 시는 현아한테만 어울리게 씌어진 것이거든. 현아 남편이 된 그 친구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한테 다시 되돌려주지도 못하고 없애버리지도 못한 거야. 그러니 시를 쓴 나도 주인이 아니야. 그럼 이만······.” 밖에는 여전히 눈이 퍼붓고 있었다. 눈길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발걸음을 뗄 때마다 ‘오빠’라는 소리가 밟히는 것만 같았다. <끝> 작가후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려선 꿈으로 살고 자라선 추억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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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1)
친구 어머니가 눈을 탈탈 털고 친구 방으로 들어가자 친구가 현아 방 쪽을 향해 가볍게 턱짓을 한 뒤 나를 슬쩍 훑어보았다. “현아는 집에 없는가 봐.” 내가 누구를 보러 왔는지 다 안다는 투였다. 나는 내 마음을 친구한테 들킨 것만 같아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든저러든 일단은 현아가 집에 없다는 게 무척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날 친구랑 현아가 한 집에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현아 없어도 돼. 그 대신 이것 좀 전해주라······.” 내가 품에서 수제품 시집을 꺼내 친구 앞에 내밀자 친구가 그걸 받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친구가 그 시집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서둘러 현아 집을 뛰쳐나왔다. 괜히 친구에게 속을 보인 것 같아 너무나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눈길을 되짚어 나오며 보니 현아 집으로 이어진 발자국 위에 눈이 제법 두텁게 덮여 있었다. 발자국을 볼 때마다 웃음이 픽픽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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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다른 건 다를 뿐이야 " (1)
디아나의 친구 민영, 티안의 현아, 서독에 간호사로 갔던 고모의 역할이 그것이다. 민영은 이혼 가정의 아이로서 같은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인물이다. 티안을 튀김이라는 별명이 아닌 이름으로 꼬박꼬박 불러주는 현아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원양어선 선원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 대해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서독 이모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노동자들의 처지에 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이고 사회정책적, 노동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는 끝내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는다. 따라서 어머니까지 불법 체류 문제로 잡혀간 티안의 눈앞에는 끝없는 ‘어둠’만 남아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어느 개인이 아닌 다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기준에 따라서는 누구나가 소수자 우리 사회 내 소수자로서 동남아출신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사회를 반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